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고백부터 해야겠다. 나에게는 오래된 몹쓸 버릇, 아니 지병이라 불러야 마땅한 증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멍하니 중얼거리는 일이다. 마치 눈앞에 실재하지 않는 귀신이라도 본 듯 혼자 말을 내뱉는 이 기이한 습관 때문에, 군대 시절에는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숱한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병의 연유를 찾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의 유년, 그 축축하고 어두웠던 기억의 심해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복기해 보면, 선명한 현실의 질감보다는 늘 희미하고 몽롱한 환상의 기운이 먼저 감돈다. 혼자 망상에 잠겨 의미 없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던 아이. 타인의 눈에는 기이한 놀이였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처절하고도 분명한 '현실 도피'였다. 아버지가 허리띠를 가죽 채찍처럼 휘두르며 다가올 때, 나는 공포에 질리는 대신 상상을 시작했다. 저 가죽 띠가 매끄러운 뱀이 되어 역으로 그의 목을 휘감는 장면을. 공포가 임계점에 도달해 이성이 마비될 때쯤 상상은 잔혹한 연극으로 변모했고, 나는 그 부조리함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웃음은 결코 용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약한 자가 선택한 최후의 방어기제이자, 현실로부터의 비겁한 망명이었다.
아버지는 대형 차량을 정비하던 기술자였다. 수 톤의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잭과 렌치 앞에서는 누구보다 침착했고, 엔진의 미세한 진동만으로 고장의 원인을 짚어내던 사람이었다. 기계와의 대화는 그토록 정교하고 무결했으나, 정작 사람의 마음이라는 복잡한 회로 앞에서는 늘 치명적인 오작동을 일으켰다. 술에 취해 새벽마다 가족을 깨워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잠든 아이를 끌어안고 회한의 통곡을 쏟아내다가도, 찰나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집안의 모든 것을 부수어 놓던 사람. 나에게 아버지는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그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환상은 그런 나를 대신해 매를 맞고, 나를 대신해 울어주던 유일한 대리인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내 안의 이 비대한 상상력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저주'라고 확신했다. 그는 알코올로 현실의 고통을 지워버렸고, 나는 환상으로 현실의 외형을 변주했다. 취기의 망각이나 망상의 도피나 본질은 매한가지였다. 그의 술이 현실 감각을 마비시켰다면, 나의 상상은 나를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이탈시켰다. 그 소름 끼치는 닮음이 두려워 나는 더욱 깊은 환몽 속으로 숨어들었다. 학창 시절 '별종' 혹은 '망상꾼'이라 불리며 교실의 외딴섬으로 밀려날 때도, 체벌을 일삼던 교사의 매질 아래서도 나는 비현실적인 웃음을 지었다. 물리적인 힘에 대항할 근육이 없던 소년에게 환상은 자아를 지켜낼 마지막 방패였던 셈이다.
이 병적인 감각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발을 들인 후에도 유령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회의실에 앉아 엄중한 보고를 듣다가도, 상대의 문장이 조금만 길어지면 나의 의식은 창밖의 풍경을 타고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숫자와 지표가 난무해야 할 머릿속에는 엉뚱한 서사들이 멋대로 피어올랐다. 상상력은 창조적 자산이 되기에 앞서 현실의 시간을 갉아먹는 좀벌레처럼 느껴졌다. 대화의 맥락은 번번이 끊겼고, 리액션은 늘 반 박자 늦었다. 눈앞의 업무를 방기한 채 혼자만의 세계를 유영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지독한 자책이 밀려왔다. "정신 차려, 여기가 현실이야." 스스로를 다그쳐 보았지만, 차갑고 딱딱한 현실보다는 따뜻하고 유연한 환상의 품이 언제나 달콤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환상이 나를 살렸다. 도저히 견디기 힘든 피로와 모멸감이 덮쳐올 때, 환상은 통증을 잠시 마비시키는 모르핀이 되어주었다.
그 혼란의 정점에서 만난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나에게 거대한 거울과 같았다. 잡지사 '라이프'에서 16년 동안 존재감 없이 일해온 월터 미티는 위기의 순간마다 허무맹랑한 백일몽 속으로 빠져든다. 영화는 현실을 무채색의 건조한 톤으로, 상상을 화려하고 역동적인 슬로모션으로 대비시키며 월터의 도피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초기의 환상은 분명 결핍을 가리기 위한 과장된 자위행위에 불과했다.
변화는 월터가 사라진 사진을 찾기 위해 실제로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시작된다. 헬기에서 북대서양 차가운 바다로 몸을 던지고, 아이슬란드의 화산 지대를 스케이트보드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그는 더 이상 상상 속의 영웅을 흉내 내지 않는다. 비록 서툴고 겁에 질린 모습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육신으로 현실의 풍랑을 직접 통과해 낸다. 이때부터 환상의 기능은 전복된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구멍'이었던 상상은 이제 현실을 밀어붙이는 '동력'이자 리허설로 전환된다. 머릿속에서 수만 번 반복했던 용기가 마침내 실제의 한 걸음을 이끌어내는 근육이 된 것이다.
히말라야의 고요 속에서 사진작가 숀 오코넬이 그토록 기다리던 눈표범을 발견하고도 셔터를 누르지 않는 장면은 이 깨달음의 정점이다. "진정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하면, 카메라에 방해받지 않고 그냥 그 안에 머물고 싶다"는 그의 말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던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가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생을 응시하는 법. 월터가 아이슬란드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현실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지병을 긍정할 수 있었다. 나의 환상은 나를 파괴하려 온 것이 아니라 부러지기 쉬운 나를 보호하며 여기까지 데려다준 생존의 기술이었음을 말이다.
마흔을 넘겨서야 나는 아버지의 파편들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기름때 절인 작업복을 입고 거대한 기계 밑으로 기어 들어가던 그의 고단한 등, 사람에게 끝내 건네지 못한 다정한 말들을 무뚝뚝한 연장 끝에 실어 보내던 투박한 손마디. 그는 그저 현실이라는 거대하고 정교한 메커니즘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지독히도 서툰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가 남긴 상처와 폭력이 용서라는 이름으로 세탁될 수는 없다. 이해와 용서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니까. 다만 나는 그를 이해함으로써 그의 삶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서늘한 결심을 다질 뿐이다.
이제 나는 술 대신 언어를 벼리고, 폭발 대신 침묵의 쉼표를 찍으며, 도피 대신 직시의 안목을 기르려 애쓴다. 불쑥 환상이 고개를 들면 예전처럼 질겁하며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그를 내 마음의 옆자리에 앉히고 가만히 다독인다. "잠시 쉬어가도 좋지만, 운전대는 내가 잡을게." 상상은 여전히 내 삶의 풍경을 다채롭게 만드는 렌즈이지만, 더 이상 그 렌즈에 매몰되어 거리감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렌즈를 내려놓고 생의 거친 민낯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화려한 환상도, 냉혹한 현실 인식도 아니다. 내 안의 연약한 환상을 혐오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그 달콤한 늪에 안주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중심이다. 환상을 든든한 등 뒤의 배경으로 두고, 한 걸음씩 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현실은 여전히 건조하고 거칠지만,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을 찾지 않는다. 현실은 바로 내 발밑에 있고, 나는 이제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