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끓는 물을 건너온 연두의 문장들:

영화 <장손>

by 달빛바람

​1. 몸이 먼저 기억하는 제사의 계절


​해마다 3월이 오면, 바람의 끝자락에 여전히 서늘한 겨울의 칼날이 남아 있음에도 지표면 깊은 곳에서는 비릿하고도 말간 흙내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 냄새는 어떤 명확한 신호보다도 강렬하게 내 감각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혹은 무엇을 정리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손부터 분주해진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이자 봄이 내게 보내는 은밀한 신호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집안 구석구석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아 경첩이 뻑뻑해진 서랍을 열어 이제는 쓸모를 다한 해묵은 물건들을 솎아내고, 겨우내 겹겹이 쌓인 창틀의 마른 먼지를 닦아내며, 베란다에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련의 행위들. 사람들은 이것을 ‘봄맞이 청소’라 부를지 모르겠으나, 내게 이것은 몸이 먼저 알아차린 계절의 예법이자, 곧 들이닥칠 어떤 시간을 맞이하기 위한 의례에 가깝다. ​그러다 문득 주말에 들른 장날의 시장통, 거친 좌판 위에 무심히 깔린 연두색 나물들과 마주치는 순간 비로소 나는 깨닫는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겨울의 냉기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끝내 생의 의지를 틔워낸 그 여린 잎사귀들이 다시 나를 불러냈음을 말이다. 그것은 내 몸의 마디마디에 각인된 오래된 제사의 시간이 돌아왔다는 전언이다. 3월의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지만, 그 빛의 이면에는 늘 쌉싸름한 흙내음과 함께 정적 속에서 차려지던 제사상의 서늘한 공기가 머물고 있었다. 나의 3월은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2. 영화 <장손>, 대물림되는 노동과 갈등


​최근 마주한 오정민 감독의 영화 <장손>은 나의 이 오래된 감각적 기시감을 스크린 위로 고스란히, 그리고 아주 아프게 옮겨놓은 듯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자욱한 증기와 날 선 기계음, 그리고 그 소음을 온몸으로 견디며 기민하게 움직이는 분주한 손등 위에서 시작된다. 3대째 가업으로 이어온 두부 공장. 콩을 불리고 갈아내며, 적절한 온도로 식힌 뒤 간수를 맞추는 일련의 과정은 외부인의 시선에는 가업을 잇는 숭고한 수행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카메라가 집요하게 비추는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진액을 남김없이 짜내어 유지되는 가문의 관성이 서려 있다.


​영화 속 풍경은 지독하리만치 사실적이다. 한여름 32도의 혹독한 더위 속에서 에어컨조차 허락되지 않는 눅눅한 주방. 기름 냄새와 뜨거운 열기를 오로지 맨몸으로 감당하며 전을 부치는 만삭의 손녀와 그 곁에서 "간수를 너무 많이 썼네." 하며 깐깐하게 지청구를 주는 할머니의 모습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구조적인 폭력을 서늘하게 증명한다. 대를 이어 내려온 가문의 명성과 번듯한 제사상은 사실 주방의 습기와 열기 속에서 마모되어 간 여성들의 거친 손마디와 젖은 앞치마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성채였다. 영화는 그 고요한 노동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비명을 담담하면서도 집요한 시선으로 포착해 낸다.


​이 영화가 유독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 성진이 마주하는 가문의 은밀한 비밀과 그가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하던 고소한 두부 냄새가 나의 유년 시절 부엌에서 풍기던 나물 냄새와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박 씨 집안으로 시집왔다는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뚝뚝한 무게감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가문의 가시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지독한 시어머니의 구박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시동생들의 차가운 눈총. 어머니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젖은 앞치마를 동여매며 그 모진 세월을 견뎠다 하셨다. 나를 낳고서야 비로소 드러난 진실은 영화보다 더 서늘했다. 아버지를 낳아준 친모는 따로 있었고, 지금의 시어머니는 새어머니였으며, 시동생들은 배가 다른 이복동생들이었다는 사실. 그 거대한 가족의 비밀 안에서 어머니는 오직 이방인이자 노동의 도구일 뿐이었다.



​3. 봉인된 비밀의 해제, 그네 위에서 들은 목소리


​나의 3월 또한 그 비밀스러운 제사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어린 시절의 봄은 늘 해가 뜨기도 전, 부엌에서 들려오던 규칙적인 칼질 소리로 시작되었다. 도마를 때리는 그 단호하고도 일정한 리듬은 어떤 알람보다 정확하게 오늘이 결코 평범한 날이 아님을 예고했다. 집안은 분주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왁자지껄한 북적임 대신 눅눅하고 무거운 침묵이 거실을 채웠고, 나는 그 기묘한 공기와 집안에 감도는 알 수 없는 어색한 기운이 버거워 골목을 떠돌다 돌아오곤 했다.


​내가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날도 제사 준비로 집안은 살얼음판 같았다. 나는 제사 음식을 거들기는커녕 교복을 갈아입지 않고 잔뜩 뿔이 나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발을 구르고 있었다. 집안 어른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 엄마를 바라보는 그 차가운 시선들이 어린 마음에도 가시처럼 박혔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엄마가 앞치마를 두른 채 밖으로 나와 내 곁에 앉았다. 엄마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네 줄을 잡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우리 가족의 비극적인 비밀을 꺼내 놓았다. ​엄마의 입을 통해 전해진 아빠의 유년은 참혹했다. 할아버지는 임신한 둘째 부인을 집으로 데려왔고, 아빠의 친어머니는 아빠가 고작 열 살 남짓하던 무렵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았다고 했다. 그런 비틀린 가계도 속에서 아빠는 그 누구와도 정을 나누지 못한 채 외톨이로 자랐다. 엄마 역시 영문도 모른 채 혹독한 시집살이와 시동생들의 날 선 눈총을 견뎌야 했다. 집안에 친가식구는 아무도 오지 않는 제사는 역설적으로 엄마가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내며 ‘큰며느리’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처절한 투쟁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엄마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심한 말투로 내게 손을 내밀며 말씀하셨다.


​“야야, 그만 심통부리고 이리 좀 와 엄마 좀 봐라. 니는 오늘이 누 제산지 아나? 사실은 아부지 낳아주신 진짜 엄마 제사란다. 아부지 어릴 때 친할매가 집에서 쫓겨나가꼬 을매나 고생을 했는지 모린다. 아부지 마음이 안 그캤나. 그래서 엄마가 누그 하나 안 오는 제사라도 이리 정성껏 채리는 거다. 니도 아부지 생각해서 오늘만 좀 참꼬, 엄마 좀 도와주그라.”



​4. 적막한 상차림, 기억의 요새를 쌓다


​그제야 알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적막한 상차림은 누군가를 대접하기 위한 식탁이 아니라 잊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기억의 요새였다는 것을. 영화 <장손> 속에서 침묵과 롱테이크를 통해 우리가 '뿌리'라고 믿어온 것들이 얼마나 많은 개인의 희생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를 묻듯, 어머니 역시 그 부당한 침묵에 맞서 나물을 삶고 무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은 자의 존엄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생애를 홀로 수습하며 엄마는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청춘을 묵묵히 그 적막한 제단 위에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완고한 질서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가 지워버린 이름을 호명하는 엄마만의 가장 뜨겁고도 정적인 투쟁이었다. 그날 부엌을 채웠던 것은 단순히 음식의 향기가 아니라 끓는 물을 통과해 온 삶의 증명들이었다.


​5. 나물을 무치는 마음, 상처를 어루만지는 수행


​그날 이후, 나는 나물을 다듬는 엄마의 손길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게 되었다. 뜨거운 물에 나물을 넣었다 건져내는 찰나의 순간, 물기를 짜내는 힘의 세기, 소금을 뿌리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그것은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억눌린 감정과 부당한 세월을 다스리는 정교한 의식이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 우리 집에서 형식을 갖춘 제사는 사라졌다. 아빠의 침묵은 더욱 깊어졌지만, 나는 이제 나만의 방식으로 그 시절의 봄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평소엔 손도 대지 않던 봄나물들을 시장에서 한가득 사 오는 것이 이제 나의 유일한 제례의식이다.


​먹을 줄만 알았지 만드는 법은 전혀 몰랐던 내가 직접 주방에 서서 나물을 무쳐보며 깨달은 사실은 나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정성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흙을 털어내고, 억센 껍질을 까고, 적당한 온도에서 삶아내어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꼭 짜서 양념이 속속들이 배도록 조물조물 무치는 과정. 어느 한 단계라도 소홀하면 나물은 금세 질겨지거나 흐물거려 식감을 잃는다. 나물은 만드는 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풀때기’에 불과하지만, 직접 주방에 서 본 자에게는 고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수행의 음식이다.


​엄마의 레시피를 더듬으며 처음 나물을 무쳤을 때는 처참했다. 시금치는 너무 삶아 곤죽이 되었고, 고사리는 덜 삶아 나무막대처럼 딱딱했다. 나물을 다루는 일은 상처를 대하는 일과 닮아 있다. 너무 뜨거우면 뭉개지고, 너무 차가우면 마음을 열지 않는다. 적당한 온도에서 숨을 죽이고, 찬물에 헹구어 정신을 차리게 한 뒤, 남은 물기를 꼭 짜내야 한다. 그 물기는 곧 슬픔의 농도이다. 슬픔을 제대로 짜내지 못한 나물은 금세 상하고 양념과 겉돈다. 엄마는 매년 봄, 그 억센 나물의 물기를 짜내며 자신의 생을 짓눌렀던 시집살이의 설움과 아빠를 향한 연민을 함께 짜냈을 것이다.



​6. 연두색 식탁 위에서 만나는 어른의 맛


​이제 나는 모양만 보고도, 혹은 풍겨 나오는 향만 맡아도 나물의 종류를 꽤 상세히 구별해 낼 줄 안다. 비늘처럼 매끄러운 미역줄기의 짭조름한 바다 내음, 아삭하면서도 독특한 식감을 자랑하는 궁채나물의 단단함, 바람을 막아준다는 이름처럼 쌉싸름한 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방풍나물, 그리고 콩나물보다 훨씬 부드럽고 가녀린 숙주나물의 담백함까지. 특히 은은한 향이 일품인 참나물과 ‘산의 고기’라 불리는 고사리의 깊은 맛을 감별할 때면, 내가 비로소 어른의 식탁에 앉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물은 말이대이, 너무 마이 삶으마 죽이 되고 안 삶으마 뻣뻣해가 못 묵는다. 사람 마음 만지는 거맨치로 적당한 때를 잘 봐야 되는 기라. 물기 짤 때도 행주처럼 너무 꽉 짜지 말고, 그러면 나물이 짓이기진다아이가. 살살 달래가매 무치야 맛이 산데이.”


​엄마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이 나물들을 구별해 내는 감각은 비단 미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에 엉겨 붙어 있던 감정의 타래를 하나씩 풀어내는 과정과 닮아 있다. 타오르던 분노와 서늘했던 슬픔을 구별하고, 상대에게 느꼈던 미안함과 자신을 향한 죄스러움을 분리해 낸다. 다 전하지 못한 말들에 대한 아쉬움과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서로 다른 그릇에 담아내듯, 나는 나물을 무치며 마음의 질서를 잡는다. 분노는 쓴맛으로, 슬픔은 짠맛으로, 그리고 그리움은 고소한 참기름 향으로 치환된다. 정작 우리 영혼을 허기지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소박한 평온의 부재임을 이제는 안다.


​나물은 삶는 과정에서 부피가 확 줄어든다. 커다란 대야를 가득 채웠던 초록 잎들이 뜨거운 물을 통과하고 나면 한 움큼으로 줄어든다. 우리의 슬픔도 그와 같지 않을까. 처음엔 세상을 다 덮을 것처럼 거대했던 고통도 시간이라는 뜨거운 물속을 지나고 정성이라는 손길로 무쳐내다 보면 결국 한 끼 식탁 위에 올릴 수 있는 단정한 슬픔의 크기로 변모한다. 내게 그 나물들은 엄마의 소리 없는 한숨이자, 아빠의 결핍을 채우려는 분투였다. 이제 나물을 마주할 때면 나는 그 가족의 비밀과 함께 끓는 물 앞에서 땀을 훔치던 엄마의 바지런한 뒷모습을 떠올린다.



​7. 뜨거운 봄을 건너오는 문장들


​영화 <장손>의 마지막, 정적 속에 흐르는 장면이 관객에게 인물들이 겪어온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전하듯, 나의 식탁 위에 놓인 연두색 나물들 또한 끓는 물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뒤 비로소 단단해진 기록들이다. 뜨거운 물을 건너온 나물은 더 이상 예전의 연약한 풀이 아니다. 그것은 시련을 통과해 가장 단단한 맛의 골격만을 남긴 생의 요약본이다. 영화 속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부자간의 불화와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묵묵히 밥상을 차리고 뒷자리를 치워야 했다. 그 지루하고도 위대한 반복이 가족이라는 위태로운 성을 지탱해 온 실체였다는 것을 나는 엄마의 거친 손마디를 보며 배웠다.


​창밖엔 어느덧 목련이 지고 진달래가 피어난다. 엄마가 떠난 지 벌써 몇 해가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나물을 무치며 그녀와 대화한다. 땅을 밀고 올라오는 연두색의 힘과 그것을 식탁 위에 올리려는 손의 움직임이 있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늘진 곳에 숨겨진 비밀도, 억울하게 잊힌 이름들도, 결국은 이 따뜻한 봄볕 아래 한 접시의 정성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믿는다.
​오늘도 나의 식탁 위에는 하얀 쌀밥과 푸른 나물이 나란히 놓여 있다. 푸릇한 나물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내음이 미묘하게 섞이는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뜨거운 봄을 맞이한다. 이 조용한 반복이 나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단단한 어른으로 빚어내고 있다. 매년 돌아오는 이 연두의 계절은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가장 뜨겁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엄마, 올해 나물은 유독 푸르고 단단하네. 나도 이제 이 맛을 구별할 줄 알게 됐다.”


​대답 없는 허공에 말을 건네지만 그 말은 사라지지 않고 주방의 따스한 증기 속에 머문다. 영화가 끝난 뒤 코끝에 남는 것이 차갑게 식어가는 계절의 냄새이듯, 나의 3월 또한 쌉싸름한 나물 향과 함께 비로소 완성된다. 이 계절의 맛을 감당하며 살아있기에 나는 오늘도 정직하게 도마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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