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장밋빛 미래는 없던 어느 흑백 시절의 고백

영화 <플레전트빌 >

by 달빛바람

장밋빛 미래는 없던 어느 흑백 시절의 고백


​1. 우리 안의 플레전트빌


​이제 3월이 지나 곧 4월. 길가에는 봄을 알리듯 노란 개나리와 하얗고 탐스런 목련이 꽃망울을 틔우고 있다. 회색 빛의 겨울 도시가 총천연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계절.

이러한 계절이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토니 맥과이어가 스파이더맨이 되기 전, 그리고 리즈 위더스푼이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던 시기. 두 배우의 풋풋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 1999년 개봉한 <플레전트빌>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흑백 영화' 속에 산다. 현대인이라는 이름의 배우들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약속된 미소를 지으며, SNS라는 거대한 세트장 위에 공들여 보정한 화려한 식사 사진을 올린다. 누군가의 셀러브리티 같은 삶을 훔쳐보며 부러움과 자괴감 사이를 오가는 루틴. 그러나 화려한 액정 화면을 끄고 돌아선 뒤 마주하는 내면은 어떤가. 우울증이라는 단편적인 단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 지독한 무감각,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비루한 의심, 그리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둬버린 '회색 안전지대'. 그것이 우리가 입고 있는 시대의 외투이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이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카메라가 꺼진 뒤 그들이 마주하는 정적은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짙고 차가울지 모른다. 현대인에게 흑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거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두른 차가운 갑옷에 가깝기 때문이다. 감정을 거세하고, 욕망을 지우며, 그저 '무난함'이라는 각본에 충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안전함의 대가는 가혹하다. 생동감이 거세된 삶은 박제된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다울 순 있어도 결코 날아오를 수는 없다.



​2. 하루 만 원의 무게

-지독했던 나의 무채색 시절


​나에게도 인생이 통째로 채도를 잃어버렸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졸업장이라는 화려하지만 얇은 껍데기를 손에 쥐었으나, 정작 세상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었던 취업 준비생 시절의 이야기이다. 약 6개월간 나는 '집'이라는 이름의 좁은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했다. 하는 일이라곤 눈이 충혈될 때까지 영화를 보는 것뿐이었다.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으로 내 텅 빈 시간을 메우려 했던 비겁한 탐닉이었다.


​매일 아침, 어머니는 식탁 위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올려두고 출근하셨다. 그 푸른 지폐 한 장은 나에게 생명줄인 동시에 가장 비참한 굴레였다. 그것은 내가 오늘 하루를 연명해도 좋다는 허락인 동시에 딱 그만큼의 가치밖에 증명하지 못한다는 선고였다. 어떤 날은 소주 한 병과 값싼 안주를, 어떤 날은 맥주 네 캔을 사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던 돈. 의욕은 바닥을 뚫고 지하실까지 내려앉았고, 간간이 들려오는 친구들의 취업 소식은 날카로운 자격지심이 되어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요즘 뭐 하냐"는 지극히 평범한 안부 인사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폭력으로 다가왔다. 전화를 피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며 나는 점점 흑백의 배경으로 스며들었다. 그때의 나는 분명 숨을 쉬고 있었으나, 영혼만큼은 흑백의 정지 화면 속에 박제된 상태였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회색 안전지대'의 거주자. 변화를 꾀하는 순간 마주해야 할 타인의 냉소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무서워 기꺼이 무채색의 풍경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는 법만을 성실하게 익히고 있었다.



​3. 균열의 시작

-박제된 낙원에 던져진 돌멩이


​영화 <플레전트빌>은 바로 그 지독한 정적의 심장을 겨눈다. 1950년대 시트콤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 남매 데이빗과 제니퍼는 완벽하지만 고착된 흑백의 마을을 마주한다. 이곳은 갈등도, 상처도, 눈물도 없다. 모든 남편은 다정하고, 모든 아내는 헌신적이며, 모든 아이는 예의 바르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에는 감동도, 뜨거운 열망도 없다. 도서관의 책은 백지이며, 소방관은 불을 끄는 법을 모른다. 위험이 제거된 유토피아는 사실 거대한 정신의 수용소였던 셈이다.


​이 박제된 낙원에 균열을 내는 것은 '욕망'이다. 현실 세계에서 온 제니퍼는 시스템의 각본을 거부하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게 움직인다. 그녀가 던진 작은 돌멩이는 잔잔한 흑백의 호수에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킨다. 농구부 주장이 처음으로 느낀 낯선 감정은 흑백이었던 장미를 붉게 물들이고, 억눌렸던 엄마 베티의 자아가 깨어날 때 마을의 나무는 불타오른다. ​이것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 색채가 복원되는 순간은 언제나 '금기'를 깨고 '위험'을 감수할 때 시작된다는 준엄한 선언이다. 규격화된 삶, 남들이 말하는 정답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고유의 빛깔을 얻는다. 영화 속 소방관들이 불을 끄는 법을 몰라 당황하는 모습은 매너리즘에 빠져 삶의 본질을 잊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과 겹쳐진다. "불이야!" 대신 "고양이!"라는 단어에만 반응하는 그들의 경직된 사고는 정해진 매뉴얼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함을 아프게 찌른다.



​4. 컬러가 되지 못하는 마음

-지식의 회복과 존재의 고통


​영화 속에서 마을이 점차 색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은 단순한 시각적 유희를 넘어선 ‘인식의 혁명’에 가깝다. 도서관의 백지 책들에 문학적 문구들이 채워지고, 사람들이 헤르만 헤세의 문장을 탐닉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무지가 곧 행복이었던 암흑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이행하는 계몽에 대한 은유이다. 데이빗이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며 마주하는 벚꽃 휘날리는 분홍빛 도로는 이제 그에게 안전한 도피처가 아닌 온몸으로 부딪혀야 할 '생생한 현실'로서의 세계를 선사한다.


​그러나 영화는 날카로운 질문을 하나 던진다. 왜 제니퍼는 수많은 성적 경험을 하고도 한동안 흑백으로 남아 있는가? 데이빗의 대답인 "그게 다가 아닐지도 몰라"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진정한 컬러로의 전이는 단순히 감각적인 쾌락이나 외적인 일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삶의 불확실성과 고통까지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주체적 각성’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니퍼가 책을 읽으며 지적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녀의 뺨에 살구색 혈색이 도는 연출은 인간의 존엄성이 육체적 본능을 넘어 지적 탐구와 자아의 독립에서 완성됨을 보여준다. 나 역시 그 시절, 방 안에서 수천 편의 영화를 보며 타인의 삶에 기생하던 시간들을 지나, 비로소 내 손으로 문장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내 삶의 채도가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이 떨리고, 모니터 위의 검은 글자들이 내 심장의 박동을 닮아 꿈틀거릴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자각했다.



​5. 금기와 억압

-회색분자들의 공포와 폭력성


​마을의 변화에 위협을 느낀 남성들의 집결은 사회학적으로 매우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진다. 아내가 더 이상 정해진 시간에 저녁을 차려놓지 않고, 규범을 벗어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자 남성들은 이를 '무질서'와 '타락'으로 규정한다. 그들에게 흑백은 질서와 안전의 상징이며, 컬러는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오염'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군중심리가 컬러로 변한 이들을 차별하고 상점에 'No Colored'라는 표지판을 내거는 모습은 우리 사회가 '다름'을 대하는 태도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다. 취업에 실패한 나를 향해 쏟아지던 "남들처럼만 살아라"라는 충고들, 튀지 말고 적당히 중간만 가라는 무언의 압박들. 그것은 사실 우리 모두를 무채색의 배경으로 박제하려는 거대한 가스라이팅이었다. 게리 로스 감독은 이 대립 구도를 통해 진정한 유토피아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갈등을 마주하고 자신의 색을 지켜낼 용기가 있는 상태임을 역설한다.



​6. 비겁했던 나의 방어기제

-흑백의 안락함


​돌이켜보면 나의 흑백 시절은 단순히 환경의 억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상처받기 싫어 선택한 나의 비겁한 '방어기제'였다. 컬러가 된다는 것은 곧 나의 취약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하며, 어떤 꿈을 꾸는지 선포하는 순간 타인의 평가라는 도마 위에 오른다. 그게 무서워 나는 기꺼이 흑백의 배경이 되기를 자처했다.


​어머니가 식탁에 두고 간 만 원 한 장으로 술을 사 마시며, 나는 취기라는 투명한 막 뒤로 숨어버렸다. 술기운에 잠시 세상이 불그스레하게 보일 때만 나는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술이 깨고 나면 방 안의 공기는 이전보다 더 짙은 회색으로 가라앉았다. 영화 속 제니퍼가 사랑 행위를 반복해도 색이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 본질적인 자아의 대면 없이 외적인 자극으로만 삶을 채우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곧 4월이다. 누군가는 고3이라는 이름의 좁은 교실에서, 누군가는 취업 준비라는 끝없는 대기실에서 흑백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매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4월의 봄바람은 오히려 칼날처럼 시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지금 견디는 무채색의 정체는 결코 무의미한 멈춤이 아니라는 걸.



​7. 어둠 속에서 빚어내는 빛깔 그리고 개화!


​남들은 봄의 시작을 노래하며 저마다의 꽃을 피우는데, 나만 여전히 겨울의 무채색 안에 박제된 것 같은 소외감. 하지만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지금 견디는 무채색의 고통은 결코 무의미한 정체가 아니다.
​흙 속에 묻힌 씨앗이 싹을 틔우기 전까지는 완벽한 어둠뿐이듯, 당신의 내면은 지금 가장 강렬한 원색을 빚어내기 위해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중이다. 영화 속에서 색이 발현되는 순간은 언제나 '결핍'을 인지하고 '변화'를 갈망할 때였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지독한 갈증과 우울은 역설적으로 당신이 컬러로 변할 준비가 끝났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이다.


​회색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비바람을 맞아야 하고, 타인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때로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끈질기게 걸어 나가야 한다. 빗줄기가 당신의 얼굴에 묻은 흑백의 분칠을 씻어낼 때, 비로소 당신만의 고유한 빛깔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깔은 남들이 정해준 색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고통과 인내를 통과해 나온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색이니까.



​8. 기꺼이 젖고, 찬란하게 물들기를


​세상이 당신을 무채색의 배경으로 밀어 넣으려 할 때, 당신만의 리모컨을 들어 채도를 높여라. 최근 다시 <플레전트빌>을 보며 내가 흘렸던 눈물은 비단 영화의 감동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숨겨진 색깔을 다시 찾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하루 만 원의 무게에 짓눌려 소주병 뒤로 숨었던 나의 비겁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야 나는 고백한다. 그때의 어둠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쓰는 문장들이 이토록 뜨거운 원색을 띨 수 있었다고.
​고3 학생들의 책상 위 검은 활자들 사이로 초록색 희망이 피어나길, 취업 준비생들의 억눌린 가슴이 분홍빛 설렘이 스며들길, 그리고 모든 반지하의 원룸 속에 다채로운 생동감이 깃들길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의 방황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당신만의 색을 조색(調色)하는 정교한 과정일 뿐이다.


​봄은 이미 당신의 문 앞까지 와 있다. 비겁했던 나의 흑백 시절을 지나 이제야 깨닫는다. 인생은 정해진 대본이 없는 총천연색 영화라는 것을. 그러니 두려워 말고 당신의 꽃을 피워내라. 당신은 이미 충분히 웅크렸고 봄을 기다려왔다. 기꺼이 비에 젖고, 기꺼이 상처받으며, 그렇게 당신만의 찬란한 꽃으로 온 세상을 물들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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