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개요 드라마. 대한민국. 105분
개봉 2001.01.20
감독 임상수
1. 오프닝 Opening
- 한과 창 그리고 새리
가리봉동 시내의 한 주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무리들이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남은 안주와 빈 술병들이 널려 있고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는 남녀가 뒤엉켜 있다. 어딘가 수줍은 표정의 한(한준)이 2층 난간 위에 고개를 까딱이는 창(봉태규)을 찾아낸다. 거리에서 헌팅한 여자아이들이 자리를 뜨려 하자 창이 벌컥 화를 낸다.
야, 이 썅 X들아, 니네 여기 왜 왔어? 너네도 한 코 바라고 온 거 아냐?
욕설이 휘몰아친다. 창의 말은 더럽고 거침없다. 그의 겁박은 분노와 불안이 섞여 어딘가 불온하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화려한 장신구를 한 그는 무리의 대장처럼 굴지만 실은 겁 많고 지질한 모습을 숨기고 싶을 뿐이다. 겁 많은 개가 앙살스럽게 짖는 것처럼 목소리를 키운다. 짖지 않으면 밟힌다는 걸 너무 일찍 배운 탓이다.
내 말 잘 들어라. 옷 벗어.
순식간에 분위기는 얼어붙고 정적이 흐른다. 소녀들의 어깨 위로 낯선 공포가 내려앉는다. 웃옷이 벗겨지고 남자아이들은 짐승처럼 환호하며 음담패설과 성희롱이 이어진다. 그때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던 새리(박잎선)가 자리에서 일어나 홀을 가로질러 나가려 한다. 하지만 팔목이 잡히고 또다시 욕설이 날아든다.
이런 썅 x 봐라. 야! 벗겨.
새리의 눈빛엔 두려움 대신 분노가 먼저 선다.
개새 x들. 이거 놔. 내가 벗어.
그리고 그녀의 맨가슴이 드러나는 순간 남자아이들의 환호성이 다시 터진다. 이 장면은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고 그 잔인함은 이 아이들이 겪어온 상처와 비어버린 마음에 비례한다. 새리가 벗은 건 옷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최소한의 자존감이다. 밤은 깊었고 눈물보다 서러움과 분노가 앞서는 청춘이다.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수위가 꽤 높다. 앳된 얼굴의 아이들이 내뱉는 욕설과 행동들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냉혹한 시대를 사는 그 아이들만의 생존 방식이다. 그들의 언행은 그 시절 경제난만큼이나 거세고 위험해 보인다. 이 영화 속 카메라는 정해진 앵글로 대상을 정확히 포착하기보다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거칠게 그들의 자유분방함을 담는다. 거친 언행과 앞뒤 분간을 못한 채 날뛰는 행위들은 홈비디오처럼 영상에 맺힌다.
화장실로 도망간 새리를 ‘한’은 얼떨결에 도와준다. 이 장면은 작고 소박한 인간다움의 불씨처럼 보이지만 비극의 씨앗이 된다. 창의 특징이 허세와 욕설이라면 한의 특징은 허기와 어설픈 정의로움이다. 그의 식욕은 단순한 입맛이 아니라 돌봄에 굶주린 몸의 사연이다. 그가 자꾸만 무언가를 먹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비어서이다. 아무도 따뜻한 밥을 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따뜻한 말을 해주지 않았던 시간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그의 모순적인 정의로움은 끝내 그를 비극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2. 어른들
그 밤, 택시 안에서 중년 운전사는 창의 말에 음흉한 웃음을 섞으며 끼어든다. 조심스레 거울을 훔쳐보던 눈빛은 어느새 동조와 방조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 웃음은 죄가 없다는 듯 가볍지만 그 무게는 참담하다. 어른이라는 탈을 쓴 이들은 제 위치를 망각한 채 아이의 곁을 맴돌다 상처만을 남긴다. 그뿐인가? 아이들의 주변엔 네다섯 살 딸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엄마, 따귀를 아무렇지 않게 날리는 보호관찰관, 미성년자를 거리낌 없이 고용하는 술집 주인, 그리고 대가를 미끼 삼아 교묘히 욕망을 거래하려 드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이 영화 속 어른들은 도리어 십 대들보다 더 미성숙하고 더 무책임하고 더 한심하다. 세상을 이끌어야 할 존재들이 오히려 가장 먼저 도망치고 가장 먼저 타락한다. 그들은 그렇게 상처 입은 아이의 그림자 안에서 기생한다. 그런 어른들이 만든 세계에서 아이들은 어른보다 먼저 철이 들고 자포자기를 배우고 어른보다 더 자주 영혼을 해친다.
3. 란
란은 단란한 주점의 접대부다. 생계의 끝자락에서 웃음을 팔며 겨우 버티는 삶이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따뜻함이 남아 있다. 란은 창을 진심으로 아낀다. 그 마음은 연정이라기보다 일종의 연민에 가깝고 보호 본능에 닿아 있다. 창은 그녀를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갈 곳 없는 처지에 결국 한과 함께 란의 자취방으로 흘러 들어온다.
주인공 넷 중에 란은 가장 생활력 있고 긍정적이며 이상하게 맑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엔 오래된 상처가 눌러앉아 있다. 그녀의 특징은 자기 탓과 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이다. 그녀의 대사
내가 재수 없는 X이지.
......
부모에게 잘못만 하면 잡 X, 못된 X, 헤픈 X 취급을 당해도... 그래도 싸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엔 체념과 자기혐오 그리고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무너져버린 무력감이 서려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강아지를 아이처럼 품에 안고 다니고 멋있는 척하는 창을 바라보며 "불쌍하잖아"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깊은 연민이다. 상처 입은 영혼은 더 작은 생명에 연민을 느끼고 짓밟힌 육신은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에 애틋함을 갖는다. 하지만 그 연민의 대상이 창이라는 것, 그 아이에게 마음을 건네버린 것이 그녀 인생에서 최악의 실수였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이 애틋하고도 서툰 정이 어떤 비극의 시작이 될지를. 그 아이가 자신의 세계를 얼마나 무너뜨릴지를. 하지만 그녀는 오늘도 웃는다. 한 꺼풀 벗기면 슬픔이 들끓는 그 웃음으로 세상을 버텨낸다. 그것이 란의 방식이다. 기댈 곳 없는 영혼이 택할 수밖에 없는 가련하고도 처연한 생존의 방식!
4. 다시 새리 그리고 한
그녀는 어느 날 다시 한 앞에 나타난다.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는 마치 먼 길을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온 운명의 노래처럼 들렸다. 새리는 현재 보호관찰 중이다. 가스를 불다 소년원에 들어가 지금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녀의 트라우마-친족 성폭행. 감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로 세상에 등을 지고 울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던 아이. 한은 그녀를 알아봤다. 말없이 스치는 눈빛 속에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기시감처럼 낯익은 공허, 닮은 결핍. 둘은 그렇게 다시 옷장 안으로 숨어든다. 위험한 일탈은 그들에게 아슬아슬한 위안이자 유일한 도피처였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을 더욱 가까이 엮었다. 말보다 손이, 손보다 눈빛이 앞섰다. 한은 갈 곳 없는 새리를 데리고 란이 머무는 자취방으로 향한다. 그렇게 창과 란과 한 그리고 새리 네 명의 기묘하고도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다. 모두가 서로의 상처에 무뎌질 때 단 하나의 장면만은 유독 따스하고 조심스럽다. 손을 다친 새리를 껴안고 어두운 터널을 함께 걷는 한. 그 장면은 이 영화 속 가장 고요하고도 찬란한 순간이다. 마치 폐허 속에서 피어난 야생화처럼. 그들이 어깨를 기대고 걸어가는 길은 터널이지만 터널 너머의 빛을 바라보는 눈망울에는 분명 삶을 향한 작은 갈망이 있다. 그 장면만큼은 상처 입은 두 청춘이 서로의 체온으로 하루를 견디려 했던 증거이다.
5. 술집 주인 용호 (성지루)
어둡고 눅눅한 술집의 지배인 용호는 한때 가리봉동 아니 서울에서 날린 사내였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거리의 아이들을 착취하고 모래알 같은 연민과 양심조차 잃어버린 인물이다. 그는 네 아이에게 거처를 내줬지만 그 손은 늘 더럽고 그 눈은 욕망으로 흐릿하다.
진상 손님과 시비가 붙었을 때 그는 칼을 맞고도 피를 질질 흘리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결국 계산 안 한 손님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끌고 돌아왔다. 경찰 앞에서도 그는 기세등등했다. “얘네들 술값 안 냈잖아요!” 피 묻은 셔츠를 내보이며 소리쳤던 사내. 그 기묘한 생명력과 짐승 같은 집념은 용호라는 인물을 단박에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의 신세는 점점 더 무너져 내린다. 이번엔 새리를 향한 그의 더러운 욕망이 문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진심이야.” 하지만 욕정에 젖은 그의 눈빛은 이미 진심을 잃은 지 오래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눈빛이 흐려진다. 그러나 새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녀의 저항은 날카롭고 단호하다. 결국 사고는 터지고 그 모든 폭력과 억압의 불똥은 애꿎은 란에게로 튄다. 휘청이며 쓰러지는 란의 몸. 한순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그날의 평온을 산산이 깨뜨린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낯익은 얼굴이 하나 등장한다. 새리의 손에 박힌 유리를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빼주는 의사. 바로 이 영화의 연출자인 임상수 감독 본인이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진지했으며 마치 실제로 상처 입은 이들을 몰래 치료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에게 이런 특별출연은 처음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2000년 작품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화장실에서 주인공 고윤주(이성재)와 마주친 ‘준표 선배’ 역으로 등장해 꽤 긴 대사를 소화해 냈고 김성수 감독의 1998년 작품 <태양은 없다>에서도 짧지만 눈에 띄는 출연을 한 바 있다.
그리고 또 한 명, 이 영화에는 또 다른 감독이 깜짝 출연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다. 영화가 끝난 뒤 스쳐 지나간 그 얼굴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이 영화의 숨은 조각 하나를 포착한 셈이다.
6. 진창 같은 갯벌 그리고 비극
장난해? 이게 바다야?
넷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무작정 도망치는 듯한 그 여정의 끝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푸르고 낭만적인 해변이 아니다. 그곳은 폐타이어와 비닐 쓰레기가 나뒹구는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 같은 갯벌이다. 그 장면은 말없이 묻는다. 이게 바다야? 겨우 이게 청춘이야? 이 진흙탕이 겨우 이게 우리에게 허락된 희망인가?
임상수 감독의 영화 눈물은 그 시절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청춘들의 뒷모습을 그것도 모자라 생채기 난 내면까지 드러내 보이는 거울이다. 그 갯벌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들이 딛고 살아가는 삶 자체의 은유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추상적인 희망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존의 진창이다.
임상수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애들은 나쁜 아이들이 아니라 그냥 모른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세상이 너무 차가웠던 거죠.
(한겨레 21, 2000년 6월호)
그가 포착한 건 '일탈'이 아니라 '결핍'이었다. 사회로부터 아무런 구조도 조언도 받지 못한 채 자생적으로 망가지는 청춘들. 그들이 향하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도망의 끝이고 또 다른 절망일 뿐이다. 하지만 도망은 영원할 수 없다. 세상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값을 요구한다. 그 값이 죄책감이든 상처든 혹은 더 큰 고통이든 간에.
배우 봉태규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한건 연기라고도 말 못 하죠. 그냥 내 감정도 모르고 울고 웃고 싸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게 진짜였어요. (씨네 21, 2015년 10월호)
실제로 그는 당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연기 경험 없이 카메라 앞에 섰다. 배우 조은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은지는 이렇게 회상한다.
카메라 앞에서 울거나 화내는 게 연기가 아니라 진짜 우리가 살던 느낌이었어요. 감독님이 그렇게 만들어줬죠. 그냥 우리를 믿고 기다려줬어요.
(경향신문 인터뷰, 2014년 3월)
그날 갯벌에서 넷이 마주한 건 바다가 아니었다. 그건 각자의 벗어날 수 없는 그늘이었고 삶의 발목을 삼키는 진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 한 아이를 삼킨다.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또 하나의 '탈출'이다. 이 잔혹하고 무정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 눈물 없이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리얼하다. 그 비극은 절망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과도 같고 부서진 희망의 찌꺼기처럼 고요히 퍼진다.
7. 스타일 Style
영화 <눈물>은 임상수 감독의 초기작이지만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학과 윤리의 기초가 이미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이야기의 중심부로 휘청거리며 파고든다. 피사체의 숨결, 눈빛, 숨죽임까지 가까이서 포착하며 마치 도촬처럼 느껴지는 리얼리티를 안긴다. 감독은 이에 대해
그건 일부러 꾸며낸 미장센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였다.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건 그게 진짜라는 확신 때문이었죠. 감정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흘러나오길 기다렸어요.
(씨네 21, 2000년 5월호)
라고 말한다. 당시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주연 배우들은 서로 기대고 부딪히며 날 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베테랑 배우들과 비전문 배우들이 뒤섞인 앙상블은 어설프고 불균질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진짜’의 감각에 기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청춘을 향해 던지는 흔하고 값싼 위로나 도덕적 충고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대신 감독은 아주 정직하게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들이 어떻게 비틀거리고 넘어지며 자신을 해치고 또 서로를 할퀴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청춘을 구제하지도 않고 미화하지도 않지만 그 안에 흐르는 무언의 연민은 마치 오래된 상처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처럼 깊고도 조용하다. 물론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비뚤어진 걸 보여줘야 하냐며 그저 욕부터 내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라. 그 아이들은 그저 너무 어렸고 혹독한 세상에 상처받았으며 무엇보다 세상의 따뜻함을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존재들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나쁜 게 아니라 단지 무지했으며 그래서 쉬이 무너졌던 것이다. 세상이 먼저 등을 돌렸기에 그들 또한 세상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새 24년이 흘렀다. 처음 개봉했을 당시엔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와 자주 비교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진심의 밀도와 내공은 명확히 갈라져 보인다. 시간은 이 영화를 잊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치 오래 묵힌 술처럼 그 향과 맛이 이제야 또렷해진 것이다. 그 시절 날것 그대로의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던 봉태규와 조은지는 이제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상처 입은 청춘의 얼굴을 연기하던 그들은 이제 상처를 끌어안고도 웃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스크린에 선다. 그리고 그 시절 조연으로 등장했던 성지루는 여전히 스크린과 티브이, 그리고 연극무대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 배우들의 존재는 이 영화를 단지 ‘과거의 작품’으로만 기억하지 않게 만든다. 그들은 이 영화와 함께 자라났고 이 영화 역시 그들과 함께 성숙해졌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원제는 새리가 절대 하지 않는 <나쁜 잠>이었다. 그 제목은 마치 이 모든 아픔과 방황이 하나의 길고도 뒤틀린 꿈이었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나쁜 건 누구였을까? 세상이었을까? 아이들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우리 모두였을까?
그들의 반항과 비행은 어쩌면 사랑받고 싶다는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임상수 감독 영화 중 필자가 가장 애정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데뷔한 임상수 감독의 2번째 장편영화이다.
당신의 2번째 카드 여덟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