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학구열
3남 3녀와 부모님, 여덟 식구의 식량만 해도 넉넉지
않는 살림에 부담이 되었던 시절, 그럼에도 두 분은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할 만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셨다. 학교 때 친구들은
학교에 교장으로 계신 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거에 대한 어떤 불평도 듣질 못했다.
본인의 못다 한 학업에 대한 욕구를 자식들에겐 대물림
하기 않기 위해 없는 살림에도 중학교 진학을 시켰다.
5명의 친구 중 중학 진학은 두 명, 아버지가 교사인 한
친구는 전주로 이사를 가고 나머지 두 명은 진학을
못 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우리 집도 남자 형제들이 내 밑으로 둘이나 있어
내가 밀리는 형국인데 부모님의 학구열로 어떻게든
가르치려고 노력하셨다,
어머니는 외갓집이 조금 사셨다.
외삼촌을 위해 외할아버지께서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서 훈장님이 상주하셨다.
어머니 형제는 5 남매로 외삼촌과 이모들, 딸 넷이었다.
딸로 둘째인 어머니는 외삼촌과 큰 이모를 공부시킬 때
어깨너머로 배워서 한글을 깨치셨다.
지금 같으면 함께 가르치면 될 일을 딸들은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가르침을 받은 큰 이모보다 어깨너머 배운
엄마가 더 빨리 깨우치셨다,
어릴 때부터 영특한 머리와 좋은 기억력으로 96세
지금도 동네에서 박박사로 통할정도의 기억력을
자랑하신다.
두 분의 교육열로 본인들의 배움은 없어도 자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신념으로 없는 돈
쪼개가며 등록금을 챙겨 주셨다.
두 분 다 선하셔서 자식들에게 욕 한번 할 줄 모르셨다.
그때는 집집마다 자식들에게 욕하는 게 다반사였다.
욕 잘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친구들은 웬만한 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에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자란 나는
누가 비슥한 소리만 해도 울었다. 울보였다.
욕도 먹고 집안일도 많이 돕는 친구들은 웬만한 욕이나
지천을 들어도 단련이 되어 끔 적도 안 했다. 그만큼 단단
해진 것이다.
중학교는 산 너머 재를 넘어 다녔고, 작은 체구에 가방 들고
재를 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매일 등산을 한 샘이다.
그때의 추억을 얘기하자면 남자들 군대얘기처럼
실타래가 되어 줄줄 나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 에피소드도 많고,
차도 없이 그 걸음으로 매일 한 시간씩, 왕복 두 시간씩을
걸어 다녔으니 지금 생각하면 돈 준다고도 못할 것 같다.
덕분에 기초체력은 잘 길러졌다.
중학교는 3개면의 아이들이 모이게 되었다.
한 반에 60명씩 4반 정도 되었으니 상당히 큰 학교였다.
지금도 사립명문 중으로 후배들이 공부하고 있다.
웬만한 시골중학교는 폐교와 통폐합을 당했지만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때가 왔다.
전주로 진학하고 싶은 나에게 부모님들은 말을 못 하고
가슴앓이를 하셨다.
밑으로 두 남동생이 있으니 나의 고등학교 진학은
어렵게 다가왔다. 인문계는 못 가고 바로 취업가능한
상고로 진학이 결정되었다.
차마 자식 학업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고, 형편은 안되고,
선배들이 와서 우리 부모님께 졸랐다.
물론 부모님도 학구열이 높아 웬만하면 보내고 싶었지만
두 남동생이 있어 고민이셨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여자사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우리 마을은 광주나 전주로 유학을 갔다.
난 언니네 시댁에 하숙을 할 예정으로 전주로 진학하고
그때부터 은행원의 꿈을 꾸었다.
진짜 내 꿈은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대학진학은 꿈도
못 꾸고 인문계 고교 진학은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