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에서 태어난 딸아이
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 자그만 마을, 동향이라 아침에
해가 뜨면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마을, 그래서
양촌이라 이름 붙여졌다.
1958년 그 해 다섯 명의 아이(다섯 명의 고향친구)가 태어났다. 그것도 모두 딸아이였다.
그중 한 아이가 나였다. 집을 새로 짓고 있어 상량을
올리는 날, 내가 태어났는데 딸 아이라 바로 보이지
않는 도장에서 낳았다고 들었다.
그 시절 남아 선호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에 여자가 상량을 보면 좋지 않다는 속설 때문에, 딸을 낳자 그리 했던 것이다.
새집을 지으면서 아들을 기대했다 딸아이가 태어났으니 서운한 마음은 있었겠지만 그 시대의 남아선호 사상을
바로 보여준다.
그 얘기를 듣고 자란 아이는 새집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뭔가 보답하는 큰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부모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동생들을 업고 다니며
잘 돌보았다. 그 어린 나이에 겪은 일 중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
내 밑으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한 명이 있다.
막내 여동생을 보다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토방으로
떨어져서 아이 머리에서 피가 줄줄 쏟아졌다.
그때 집집마다 만능 빨간 연고가 있었다. 그 걸 듬뿍 발라
지혈을 시키고 아이를 업고 이웃집 담장밑으로 숨어 있었다.
부모님께 혼날 것이 걱정이 되고 동생의 다친 머리도
걱정이 되었다. 착한아이라 평소 혼나본 적 없어서 싫은 소리도 못 듣는 아이였다.
부모님께서 부르면서 찾아 나서서 결국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많이 혼나지는 않고 스스로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큰일을 겪으면서 당황하고
얼마나 놀랬을까 가슴 아프다.
여섯 형제 중 내 위치가 동생을 잘 돌보는 자리였다.
남동생들은 치고받고 노니 감당이 어렵고 여동생은
조용하니 늘 업고 다녔다.
그 시절 함께 태어난 친구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누구나
육아 아닌 육아를 책임지고 있었다. 부모님들은 논밭으로
일을 찾아 나가셨기 때문이다.
요즘 자녀가 한 두 명이다 보니 과잉보호하고 있다.
형제가 많던 시절 먹을 게 부족했던 시절에는 먹을 것
가지고도 나눠 먹는 게 당연시 여겼다.
너무나 풍족한 물질문명시대, 내 것만 중시하고 남을
살필 줄 모르는 시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샘이다.
그 시절 먹을 것은 좀 부족해도 많은 형제자매와
치대고 자라며 가족공동체 경험, 나누며 사는 문화,
돕고 사는 문화를 몸소 체험해서 험한 세상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것 같다.
그 시절 부모님의 굳건한 정신과 강인한 생활력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중요한 삶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