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의 삶 이야기

어릴 적 최고의 간식(번데기)

by 해피손


1960년대 초 우리 마을에는 점방(지금의 슈퍼마켓)이 한 군데 있었다. 몇 개 마을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파는 물건도 생필품에 문방구류 아이들 군것질 거리까지 다양했다.


어려운 시절 끼니도 이을 수 없어 집집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점방에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도 평범한 농부가족으로 논농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우리 여덟 식구(3남 3녀) 끼니 때우기에 급급했다.


새벽 칼질소리에 잡이 깨곤 했는데, 식량을 절약하려는

엄마의 무 써는 소리였다. 무를 잘게 썰어 가마솥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쌀과 보리를 얹었다.


그렇게 하면 쌀 한 톨 눌어붙지 않고 여덟 식구 배를 채우는데

보탬이 되고 숭늉은 무가 눌어 구수하고 맛있었다,

엄마의 근검절약이 몸에 배고 소화도 돕는 일거양득의

특별식이었다.(그때는 무밥이 정말 싫었다)






몇 살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4~5살쯤 인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새집을 지어 마을 가운데로 내려오고

큰집은 동산아래 우리가 살던 조부모집을 차지하고

계셨다.


친정에서 살던 큰집이 시부모님은 모시지 않고(둘째인 우리 부모님이 모셨다) 돌아가시자 집을 차지하신 것이었다.


그때는 농가부업으로 누에치기, 담배 농사, 삼 농사등이

이뤄졌다. 큰집은 누에치기를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나와 동생들이 큰 어머니가 풍로를 돌리며

솥에 물을 끓이며 누에고치(누에가 다 자라 집을 지은

하얀 모습)를 넣으면 단백질(세리신)은 녹고 고치를

지을 때 감았던 명주실이 술술 풀리며 번데기가 둥둥 떠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누에고치에서 실 뽑아내는 모습도 신기하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하나씩 떠오르는 번데기의 맛은 그 어떤

간식 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몇 분에 하나씩 나오는 번데기에 눈이 멀어 노는 재미도

마다하고 큰집 명주실 뽑는 날엔 주야장천 그 앞을 지켰다.


큰 어머니는 생산을 못하셔서 아이가 없었다. 그 수확을

우리 형제들이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지금은 타산이 안 맞아 양잠농가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시절 고향에서 최고의 영양식이며 간식은 번데기였다.

지금도 그때의 그 맛을 잊을 수 없디.





부엌에 가면 좀도리(절미)라고 주둥이가 작은 항아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밥 한 끼 할 때마다 도장에서 쌀을

내오고 그중 한 주먹은 어김없이 좀도리 안으로 스르르 흘러들어 갔다.


그 시절 엄마의 근검절약정신은 우리 6남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어쩌다 식량이 떨어질 땐 좀도리를 털어 끼니를 해결할 용도도 되고, 긴급한 일이 생길 때

쌀을 팔아 해결키도 하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던 어린 시절,

연필하나 노트 한쪽도 절약하는 정신은 엄마의 좀도리

에서 시작된 듯 하다.


어린 시절 또 다른 최고의 간식은 아이스케키였다.

특유의 억양으로 '아이스 케키' '아이스 케키' 하며

동네에 장사가 들어오면 집집마다 엄마를 졸라 낡은

고무신, 장작개비, 빈병등을 주고 바꿔 먹었다.


고구마, 감자등은 간식보다 주식에 가까웠다.

점심 한 끼 간단하게 때우기 적당한 메뉴였다.

밥이 부족하고 어중간할 때는 고구마나 감자를 삶아

한 끼로 대체했다.


식량이 부족해도 작은방에 한가득, 밥상 한가득 모여

오손도손 얘기하며 식사하던 그때 그 모습이 그립다.


많은 형제들도 불평 없이 부족한 식사, 콩 한조각도

나눠먹는 마음가짐을 배우며 자랐다.

번데기와 같은 진정한 먹거리가 풍부했으면 좋겠다.


동생에게 양보하는 언니 오빠들, 그를 따르는 동생들의 끈끈한 우애는 그렇게 꽃피었다.


물질만능 시대인 요즘 옛 어른들의 근검절약정신과

콩한쪽도 나눠먹는 돈독한 우애 문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에 꼭 새겨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