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엄마 인내심 많은 프랑스 엄마 되기...
부모가 되어 배우는 사랑 그리고 헌신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매일 한 편 혹은 두 편의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이틀 동안은 글을 쓰긴 했지만, 공개할 수준은 아니었다. 총 네 편의 글을 썼는데 완성도가 부족해서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고 비공개로 전환했다. 과거의 기억들을 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떤 사건을 기록하면, 그 순간의 어린 나와 현재의 성숙한 나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오늘의 기분이나 최근의 일들을 쓰고,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사건들을 쓰는 것으로 하루에 두 편의 글을 채우려고 했다. 하지만 일상에 쫓기다 보면 이것도 잘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이틀 전에는 딸아이가 학교에서 낙상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갔다 왔다. 그날은 정말 스펙터클한 하루였다. 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오늘 아침 남편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새치를 발견했다. 나는 만주 광야에서 물건 짝처럼 팔려 다니면서도 인내심으로 살아왔고, 북한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인내심으로 버텨왔다. 그런데 아이 둘을 양육하면서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자주 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사람이었던가 하는 회의감에 휩싸일 때도 있다.
어제도 하루 종일 불안했다. 내 손목에 차고 있는 스포츠 시계와 핸드폰에 연결된 블루투스 기능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을 자꾸 확인했다. 나는 원래 핸드폰을 자주 확인하지 않는 편이다. 그 습관 때문에 꽤 괜찮은 한국남자친구들과 갈등을 빚었고 헤어졌다. 그런데 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핸드폰을 늘 곁에 두고 산다. 특히 어제는 딸아이가 낙상사고를 당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생길 안전사고 위험 때문에 경계심을 높였다.
학교를 마친 후 잠시 공원에서 간식을 먹이면서 놀게 했었는데, 딸아이가 오빠와 오빠 친구들과 함께 놀겠다고 고집했다. 공원에는 나무로 된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 밑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움푹 파인 공터가 있다. 공터로 내려가는 길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그곳에서 낙상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딸아이가 계단 옆에서 놀다가 돌계단으로 굴러 떨어질 뻔한 것을 앞집에 사는 발렌탕엄머 마리옹이 기적적으로 막아줬다.
남자아이들은 원래 그런가, 아니면 내 아들만 특별한 건가?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다. 고막이 남달리 두툼해서 엄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아들의 학교에서 오늘은 포토 수업(cours de photo)이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멋진 옷을 입고 오라고 했나 보다. 주말에는 일찍 일어나고, 주중에는 늦잠을 자는 우리 사랑스러운 아들은 오늘도 아침 늦게 일어났다.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아침을 먹더니, 방으로 들어가 장롱 서랍 안에서 가장 멋지고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단출한 주름치마에 교복만을 입고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에게 잠깐이나마 '그때가 좋았다. 전부다 교복을 입혀야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어도 여덟 시 이십 분에는 집을 나가야 학교에 제시간에 도착할 텐데… 빨리 준비를 끝냈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옷장 안의 옷을 다 꺼내버렸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라고 했지. 육아 서적에서 읽은 것 같은데, 이놈의 자율성은 다른 집 아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 같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나는 목구멍이 답답해 오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툭하고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감정을 조절하며 엄마의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반협박과 공갈로 빨리 옷을 입게 만들었다. 작은 딸은 들춰 안고 큰 아들은 뛰게 하고 겨우겨우 제시간에 학교에 도착했다.
프랑스는 길거리가 혼잡하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프랑스는 역사유물을 소중하게 보전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현대의 편리함보다는 과거의 가치를 보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과거 자동차가 없던 시절 마차와 보행자들을 위해 만들었던 중세 도로를 조금 넓게 확장하고 아스팔트를 놓고 양쪽으로 인도를 만들었다. 프랑스 도심은 비좁고 불편하다. 가끔은 좁은 길에 자동차와 보행자와 전동 킥보드 그리고 자전거가 뒤엉켜 있을 때도 있다. 그 속에서 천방지축 위험성을 전혀 모르고 뛰어다니는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도 있다. 오늘도 출근시간에 쫓기는 자동차들 틈에서 아이 둘을 겨우 학교에 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은 무슨 글을 쓸까 생각하며 글 내용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출입문 앞에서부터 아이들의 방까지 옷가지들과 장난감 그리고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 같았다. 아이들이 입었던 옷들을 정리하며 건조된 빨래를 접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고단하고 힘든 일도 많다. 그리고 이 두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한다. 나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일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상황 앞에서는 피하지 않고 감당해 냈다. 나는 책임감이 높은 사람인 것 같다. 그 책임감의 무게가 나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는 걸 알기 때문에, 책임을 질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다.
자식이라는 것은 그럴 수가 없다.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지. 가끔은 이 책임감이 버거울 때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도 오늘처럼 엄마가 될 거냐 묻는다면, 나는 다시는 이런 무거운 책임을 떠 맞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을 통해서 얻는 잠시 잠깐의 행복은 온 세상을 다 안은 듯 행복할 때도 있다. 그 찰나의 순간의 행복이 그간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부모님들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아이들은 온전히 부모를 믿고 따른다. 가끔 떼를 쓸 때도 있지만, 그 믿음의 바탕에는 부모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일상에서는 자주 다투고 으르렁거릴 상황이 만들어진다. 내 마음의 근본적인 바탕에는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있다. 나는 엄마가 되면서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배우는 것 같다.
나와 완벽히 분리된 인격체인 한 생명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기적 같다.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살 것이다. 나의 부모도 나를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