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칠성과 참기름(북한에서 프랑스까지 여정)
북한엄마 한불혼혈아이들 양육일기
나는 '짱구는 못 말려’라는 만화를 참 좋아했었다. 한국에 살 때 나에게는 소중한 꿈이 있었는데 딱 짱구네 가족만큼 사는 것이었다. 장구아빠 신형만은 만년 과장이지만, 기복 없이 평범하게 회사 생활을 한다. 크게 돈을 잘 벌거나 능력 있는 남자는 아니지만, 꾸준히 근면하게 성실하게 가정을 위해 헌신하고 일상을 묵묵히 견뎌내는 그런 가장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짱구 엄마 봉미선은 어쩌면 그렇게 나를 닮았는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떠들고, 있는 대로 감정 표현하는 봉미선은 정말 나와 닮았었다. 짱구 같은 개구쟁이 아들 하나에 짱아가 같이 귀여운 딸 하나 낳고 지지고 볶으며 살아갈 가정을 이룬다면 참 행복하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외로운 일상을 견뎌 냈던 것 같다.
평범함이란 참 어려운 거였다.
특히 나처럼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평범함이라는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예쁘게 잘 전시된 그림 같은 거였다. 짱구 아빠 같은 남자는 흔할 것 같지만, 서울 하늘 아래서 찾아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나만 그런 남자를 찾는 건 아니었던 듯싶었다. 신의 축복인지 아니면 내 운빨 좋았던 건지 아니면 시각화가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착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남편을 만나서 짱구네 가정처럼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살고 있다. 대출이 24년 남았지만, 대출금을 감당하기 부담스럽지 않은 소득에 온 가족이 지지고 볶으며 일상을 살아가니 내 꿈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저녁 퇴근한 남편이 저녁용 요리를 준비하고, 나는 아이들을 씻기고 만화를 틀어주고, 남편과 앉아 일상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아페레티프를 마셨다. 남편이 정성껏 준비한 저녁을 아이들과 함께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어렸을 때 어른들의 심부름을 했던 이야기, 아이들의 삼촌과 장난꾸러기 짓을 하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의 아버지, 아이들의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지하창고에서 3리터짜리 와인병을 꺼내 가지고 계단을 오르는데 지하에 숨어있던 박쥐가 어린 남편의 머리 위로 날아갔단다. 갑자기 달려든 박쥐에 놀랐던 남편은 손에 들고 있던 무겁고 큰 와인병을 놓쳐버렸다. 와인병은 그대로 콘크리트 계단에 떨어졌고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수습할 틈도 없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이들의 잘 못을 크게 혼을 내지는 않는 것 같다. 어머니가 대걸레를 들고 내려와 지하창고에서 집으로 연결된 계단을 닦았고,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뒷수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서양 사람들은 아이들이 실수를 너그럽게 대해주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들은 큰 아이가 나에게 졸라 댔다. ‘엄마! 엄마도 어릴 적 장난꾸러기 짓 한 이야기 들려주세요’ '어!!! ’ 한참을 망설이다가, 급하게 북한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동심을 잃은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 주고 싶은 나는 북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잘 나누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상들이 생기면 도저히 피할 수가 없으니, 북한에서 좋았던 추억들을 골라 내게 된다.
'엄마에게는 여동생이 있었어. 이름은 김전옥이라고 해, 너희들에게는 이모가 되겠다. 엄마는 전옥이 이모랑 장난을 많이 쳤어. 한 번은 전옥이 이모와 엄마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장난을 치기로 했지, 전옥 이모가 찬장 깊은 곳에 할머니가 숨겨둔 참기름을 발견했다. 북한에서는 참기름이 아주 귀했단다. 전옥 이모는 참기름을 꺼내고 간장을 섞어 할머니가 즐겨 만들어 주던 참기름 밥을 만들기로 했어. 엄마는 무쇠솥 가마뚜껑을 열어 강냉이밥을 꺼냈고, 전옥 이모는 참기름을 밥 위에 부었어. 계속 부었어, 멈추질 않았어. 마침내 참기름 한 병을 다 부어서 참기름 간장밥을 만들었단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오면 혼이 날 것 같아, 거의 비어 있는 참기름 병에 물을 담았지. 그리고 원래 있던 위치에 기름병을 넣어 뒀단다.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지만, 며칠 있다 마침내 할머니에게 들켜버렸다. 할머니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했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 주겠지만, 참기름은 너무 아깝다고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혼이 났고, 거짓말을 한 것만 혼이 났어. 그러니 할머니에게는 참기름 한 병보다는 엄마와 이모가 거짓말을 한 게 더 큰 잘못이라 생각했던 거야.’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아들은 이내 아빠에게 졸라 대기 시작했다. ‘아빠 얘기가 더 재밌어요. 아빠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주세요.’ 남편은 웃으며 아이들에게 또 다른 어린 시절의 장난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북한을 나와서 한국을 거쳐 프랑스라는 땅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음에 참 감사하다. 아이들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아이들의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오늘을 내가 꿈꿔 오던 건데, 별치 않은 것 같은 이 소소한 일상이 나에게는 먼 꿈같은 이야기였을 때가 있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오고 오고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면 북한에 있는 우리 엄마는 얼마나 좋아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향 이야기는 아프니까. 북한 이야기를 아직은 나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다. 나중에 커서 되도록이면 늦게 늦게 엄마의 고향에 대해 물었으면 좋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도 어렸을 때 행복했던 추억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은덕 철 다리를 건너 은덕 군 백화점 옆에 있는 간이식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던 기억도 있었고, 아버지 까마즈 트럭 운전 칸에서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서 은덕 군 시내를 드라이브하던 기억도 있다. 차창 밖으로 쏟아져 내리던 햇빛, 가끔 밤길을 달릴 때면 가로등이 없는 밤길 차창 밖으로 쏟아 들던 별빛, 그중에서도 늘 화려하게 빛을 내뿜던 북두칠성의 아름다운 별빛은 잊을 수가 없다. 은덕군의 어디를 가든 길 양쪽으로 가득 심어져 있던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타고 남은 풍로의 석탄 숯불에 친구들과 감자를 구워 먹던 기억도, 어머니 따듯한 가슴에 안겨 숨 막힐 듯한 사랑을 가득 받던 기억도 나에게는 남아 있다. 은덕 군의 맑은 시냇물에 나의 말캉말캉 했던 작은 몸을 담그던 기억도, 친구들과 날이 저물도록 숨바꼭질을 놀다가도 엄마들의 ‘밥 먹자!’ 소리에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 후지진 곳에 몸을 숨기고 키득키득 웃던 기억도…
나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은 꽤 있었다.
하지만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까? '고난의 행군’이라는 그 기가 막히던 시기는 우리에게서 모든 걸 앗아가 버렸다. 내 삶은 그 시절의 고통으로 지배되어 버렸다. 행복했던 기억은 곧 어둡고 침울하고 한치의 미래도 내다볼 수 없었던 캄캄한 그 시절로 뒤덮여 버렸다. 미사일이 터지는 전쟁을 겪은 들 그렇게 참혹할 수 있을까? 그 참혹했던 그 시절이 없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까? 고난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고난의 행군’이 있었기에 나는 북한을 나올 용기를 냈다. 내 삶에 비록 동심은 없어도, 나는 내 삶을 살아 내면서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그래서 오늘의 일상이 더없이 소중한 거라는 것도 잘 안다. 내가 누리는 오늘이 누군가에게는 꿈이고 희망이라는 것도 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를 걸어도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꿈이고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동화를 들려주고, 좋은 꿈을 꾸라고 속삭이며 오늘을 마무리했다. 아이들의 방에 등을 끄려고 벽장을 바라봤다. 아이들이 즐겨 놀던 장난감, 그 밑에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는 책 들이며, 그 옆으로 촘촘히 걸려 있는 옷들을 보니 뿌듯했다. 나의 아이들만큼은 풍요롭게 행복하게 키우겠다고, 20대는 일만하고 부지런히 아끼고 모았다. 그렇게 마련한 내 집에서 아이들에게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주말에는 넓은 정원에 수영장이 딸린 남편의 본가에서 보내고, 방학에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나의 아이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듯 뿌듯한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북한에서의 나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부족한 것 없이 누리고 산다. 내 어린 시절이 가엽기도 하고, 북한에서 태어나서 자라야만 하는 아이들도 불쌍하기도 하고, 행복감을 온전하게 즐길 수 없는 건 나의 숙명이라도 되는 걸까? 이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풀뿌리와 나무껍질이 뒤섞인 음식으로 배를 채우라고 권하는 북한엄마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잠깐 북한엄마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아파왔다. 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의 뱃속마저 채워주지 못하는 부모들의 심정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내느라 동심도 지키지 못한 엄마이지만, 내 자식의 동심만을 지켜주겠노라 노력하는 내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