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만의 느림의 미학, 그 뒤에 있는 자본의 가치
성격 급한 탈북민 프랑스의 '느림의 미학'에서 발견한 미래의 가치
프랑스에서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걸 잘 못한다. 프랑스는 하루 7시간 주 5일 노동한다. 그 나머지 시간들은 전부 쉰다. 그리고 유급휴가는 회사마다 다르지만, 40일이 넘는다. 주말을 포함하면 거이 두 달을 쉴 수 있다. 한국에 살 때는 이게 부러웠는데, 막상 프랑스에 사니까 이거 힘들었다. 여기는 한국처럼 먹고 놀데도 별로 없지, 프랑스 티브이는 재미없기로 세계 둘째가라면 서럽다. 넷플릭스도 그게 한두 달이지 일 년 내내 스크린만 보자고 하면 그거 고문이 따로 없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생산적이지도 않고 쓸데도 없는 일을 만들어 내서라도 본인 시간을 좀 바쁘게 보낸다. 반면 프랑스 사람들은 느리다. 기본적으로 프랑스인들 성향 자체도 좀 느리고, 행정 시스템도 엄청 느리다.
프랑스의 길거리를 거닐어 보면, 프랑스 사람들은 아침 이른 시간부터 길거리 비스트로에서 커피 한 잔에 작은 접시에 크로 화상을 두어 개 놓고 편안하게 앉아서 느리게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가끔은 같은 자리에 오전 내내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도 있다. 신문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을 보는 것도 아니고, 책을 보는 것도 아니다. 오후 시간 때쯤 시내를 나가 보면 공원 벤치에 따듯한 햇볕을 쬐며 오후 내내 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다. 담소를 나누거나, 혹은 아무것도 안 하신다. 은퇴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루 종일 낯 말 맞추기 게임을 하시는 분도 봤다.
교민들이 하는 얘기가 있는데 프랑스 관공서에서 업무 처리를 받으려면 서류 접수하고 나서 접수했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었을 때쯤 연락이 온다고 했다. 내가 직접 겪어 보니까 진짜 그랬다. 프랑스는 아직 전산화가 잘 안 되어있다. 아직도 서류를 직접 써서 아날로그식으로 기록해야 하는 것들도 참 많고 서류더미를 집에 보관해야 한다. 그 서류들을 준비하고, 정부에 전산에 기록시키고, 내 손에 확인 서류를 받는 동안 엄청난 서류 작업과 절차들이 뒤엉켜 있다. 왜 이렇게 사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아날로그적이다.
내가 프랑스에 올 때 한국에서 딴 운전면허증을 국제면허증으로 바꿔서 들고 왔다. 국제면허증으로는 일 년 정도밖에 프랑스 국내에서 쓸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 국내 면허증으로 교환 신청을 해야 한다. 메일로 rendez-vous(미팅을 요청하고 미팅 날짜를 ) 잡아야 한다. 미팅까지 잡히는데 한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필요한 서류들이 되게 많았는데, 그 서류들을 모두 준비해서 제출하고 프랑스 운전면허증을 내 손에 받아 쥐는 데 정확히 11개월이 걸렸다. 세상에…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제 프랑스에서 운전을 할 수 없겠다. 저것들이 내 서류를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차 사지 말아야겠다고 포기할 때쯤 연락이 오긴 왔다. 한국에서 빨리빨리 시스템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에게 프랑스만의 느린 행정 시스템은 진짜 환장하게 만든다. 일부 한국 사람들은 프랑스의 관료주의를 얘기하던데, 사회주의권 나라들이 관료주의가 있다. 근데 프랑스의 관료주의는 사회주의권 나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프랑스 사람들 자체가 느림에 익숙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면서 시간을 참 잘 보낸다.
프랑스 마트에 가면은 주말 같은 때는 정말 기다란 줄이 서 있다. 마트 계산대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캐셔들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뒷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동료와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느릿느릿 일한다. 근데 쇼핑카트에 물건을 잔뜩 담고 순서를 기다란 고객들이 되게 잘 기린다. 웃긴 건 고객들이 핸드폰도 안 보고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 진짜 잘 기다린다. 그중에는 성격 급한 사람들이 짧은 줄을 찾아서 왔다 갔다 하거나, 상품 몇 개 안 된다며 먼저 계산하게 해 줄 수 없겠냐는 어르신들이 간간이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 모든 고객들이 다 잘 기다린다. 병원이나 관공서에 약속을 안 잡고 일을 보려면 보통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두 시간의 기다림은 프랑스 치고는 빠른 거다. 네 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고, 오후 내내 기다린 적도 있다. 근데 웃긴 건 프랑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너무 잘 기다린다. 간의 테이블에 잡지가 쌓여 있어도 안 읽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고, 또 핸드폰도 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이 진짜 많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구경하거나, 이 사람 저 사람 얼굴 뜯어보면서 그렇게 그냥 기다린다. 이거 진짜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나는 프랑스에서 7년 살았는데, 이런 프랑스 사람들을 구경하는 거 진짜 너무 재밌다. 프랑스는 실업급여 3년이다. 프랑스는 식당 종업원이든 상점 직원이든 마트 캐셔든 일단 정규직이나 계약이 성사되면 해고당해도 3년 동안 본인이 받던 월급의 80퍼센트를 보장해 준다. 그리고 가정이 있다고 하면 소득이 낮으면 아이들 생활비 학비 같은 것도 다 지원해 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미래 대한 불안감 없이 편하고 놀고먹기 딱 좋은 시스템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는 거 이거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거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 진짜 힘들다. 가끔은 고통스럽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죄책감 없이 놀아본 적이 거의 없는 민족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3년 동안 진짜 너무 힘들었다.
프랑스에 오래 살았던 언니가 프랑스에 살려면 ‘나 스스로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했다. 아니면 은퇴 후에 진짜 괴로울 거라고 했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런 것들을 하면서 시간들을 보내야 하고 그거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매일 한편씩 글을 써내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야 하는 무료한 시간들을 재밌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 중에 일환이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것들이 되게 많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들을 굉장히 고통스러워한다. 생산적인 활동을 안 하고 나를 계발하지 않고 젊음을 보내는 거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 그 시간들을 아무 죄책감 없이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보내는 그 시간들이 필요하다.
사회적인 질책도 없고 스스로의 자책도 없이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그런 시간들이 모여서 프랑스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프랑스는 '느림의 미학’을 통해서 세계적인 철학가도, 디자이너도, 화가도, 사상가도 문학가도 혁명가도 배출해 내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것도 안 하는 그런 시간들은 가져보니 나와 대화하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한 시간만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앉아 있어 보길 바란다. 당신은 과거를 되짚을 거고, 읽은 책을 기억해 내고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와 깊이 있는 대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들 안에서 당신은 많은 길들을 엿볼 것이고, 본인 안에 다양한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조업에 특화된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물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과정은 쓸데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랑스에 와서 살아보니 여기는 결코 그렇지 않다. 프랑스 사람들은 노동을 적게 하고, 돈을 덜 벌고, 세금을 더 내고, 소비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가치를 따져가며 합리적으로 소비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낭비를 최소한으로 한다. 이런 생활이 습관이 되면 시간들이 남아돌게 된다. 그로 인해서 남아도는 많은 시간들을 본인과 가정을 위한 시간들로 채운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세상과, 삶 그리고 사회 그리고 인생에 대해 고민한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단계 중에서 제조업은 자본주의가 거쳐가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있다. 선진국은 복지를 장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미래의 가치들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그 비생산적인 것 같고, 비효율적인 것 같은 각 개인들의 시간들이 모여 10년 후 20년 후 그리고 백 년 후 장기적으로 우리의 세상을 바꾸고 인류를 진보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