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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Nov 08. 2023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북한 영생탐의 공통점

두오모와 영생탑을 바라보며

나는 북한에서 살았을 때도 이탈리아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영웅적인 저항 운동, 이탈리아인들의 뛰어난 가죽공예 기술 그리고 맛있고 다양한 파스타나 피자 같은 음식들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산 가죽제품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포근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가볍다고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혼혈인 남편 덕분에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씩 이탈리아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곳을 여행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알프스를 넘어갈 때면 늘 운전대를 내가 잡는다. 이웃한 나라를 자가용을 타고 국경을 넘는 것이 나에게는 개인적인 로망이기 때문이다. 나의 꿈 중에 하나가 내 자가용을 타고 중국 국경을 넘어 북한을 가보는 것인데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역, 토리노 밀라노 그리고 쿠네오 그 주변에 남편의 친척들이 살고 있다. 이탈리아는 반도에 위치한 나라라서 그런지 한국과 정서적으로 참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보다 패션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어린아이들부터 젊은이들 어르신들까지 옷을 참 잘 입는다. 시골 촌구석에 가 봐도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한 할아버지들이 반바지에 색색의 폴로티셔츠에 세련되고 간편해 보이는 가죽 단화(mocassin)를 멋지게 신고 걸어 다닌다.


나의 이탈리아 여행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지역은 밀라노였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상업중심인 도시로, 이탈리아의 경제수도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젊은이들은 밀라노에 모여들어 꿈과 희망을 찾는 것 같았다. 밀라노에 대한 여행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기본적인 정보들은 생략하고 나의 느낀 점을 중심으로 써 보겠다. 유럽은 고층건물이 많지 않은데, 밀라노도 마찬가지였다. 5층에서 6층 정도의 건물들이 도시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넓은 도로 양쪽으로 주상복합형태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건물들은 현대적이지 않은 다소 낮은 높이였다. 일층은 주로 상가로 되어 있었다.


나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이탈리아 밀라노나 프랑스 리옹 등 유럽의 상업중심의 도시들을 보면서 함경북도 도 소재지인 청진이 떠올랐다. 유럽을 보면서 북한 청진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표현이냐 싶겠지만, 한국은 미국을 보고 배운 반면, 북한은 러시아를 보고 배웠고, 러시아는 유럽을 보고 배웠다.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은 철학적으로 예술적으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건축양식은 평양을 제외한 지방 도시들은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독의 국가주의적 건축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동독과 소련은 유럽에서 영향을 받아서 발전시킨 것 같다. 유럽의 도시들은 최대 6층을 넘지 않는 다소 낮은 건물들이 인상적인데 북한의 각 지방의 대도시들도 그렇다. 김일성은 소련을 공산주의 아버지로 보고 배웠지만, 소련은 문화적으로 유럽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러다 보니 북한의 도시공학 건축양식들이 러시아와 유럽이 혼합되어 있다. 6.25 전쟁을 겪는 와중에 김일성은 잿더미가 된 북한의 도시들을 재건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참전 중이던 도시건축 기술자들을 동독이나 러시아로 보내 유학을 시켰다. 그 사람들이 유럽의 예술이나, 건축기법을 전수받아 북한의 도시들을 계획하고 건축다.


밀라노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념물은 아마도 두오모일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하고 지었다는 그 화려한 두오모는 예술에 아무런 조예가 없는 나도 그 웅장함에 압도가 된다. 두오모는 백 년 동안 지어졌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로테르담 성당을 가 봤는데 사실 예술적인 웅장함은 그렇게 많이 못 느꼈다. 북한에서 프랑스 문학의  '로테르담 꼽추’라는 소설을 읽은 적은 없고, 그 소설을 세계 몇 대 문학선 하면서 배운 적이 있다. '로테르담 꼽추’를 왜 못 읽었는지에 대한 다음 글을 준비 중이긴 한데, 잠깐 소개하려면 북한은 책이 참 귀하다. 김일성이 주체사상 전 인민 보급화를 한다고 하면서 인민의 독서를 통제했다. 워낙의 유명한 소설이다 보니 학교에서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어떻게 구해서 읽고 밤마다 모여서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를 통해서 '로테르담 꼽추’를 들었다. 로테르담 성당은 소설의 배경이 된 역사성과 뒷얘기 때문에 감동을 받았다면, 밀라노 두오모는 보는 순간 시각적으로 그냥 압도가 된다. 이 성당이 건축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뒷얘기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걸 어떻게 지었지라는 의문이 든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대리석이 풍부한 나라다. 그래서 건축물들 중에 대리석을 재료로 한 건축물들이 많이 있다. 나는 대리석과 인연이 있다. 중국에서 팔려 다닐 때 팔려갔던 주인집 아저씨가 싼동성 지방에서 대리석을 채굴하는 광산을 운영했다. 주인집 아저씨는 대리석을 채굴해서 한국으로 수출한다고 했다. 그때 대리석을 직접 채굴하는 인부들에게 밥을 해주면서 생활한 적이 있는데 인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리석 채굴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했다..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 찍어 낸 것도 아니고, 단단한 대리석을 깎아서 인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감동적인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성당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장 작은 조각을 찾아보았다. 20센티 정도의 작은 예수의 조각상이 있었다. 예수가 쓰고 있는 면류관과 면류관 주변으로 듬성듬성 박혀 있는 가시가 보였다.


현대의 발전된 과학 기술로도 흉내기 어려울 것 같은 이 화려한 건축물을 중세 시대 기술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올렸다. 돈을 준다고 이런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누군가를 감동시키기 위해 이런 위대한 인류의 유산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두오모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중세를 지배했던 신앙과 '신'이데올로기가 이 사람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움직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세에 그들이 믿었던 ‘신’ 하나님은 현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다르다. 중세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인 '신’을 얼마나 깊이 내면화를 했으면 이런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두오모를 보니 중세 유럽을 지배했고 이탈리아 인들이 믿고 의지했던 '신’에 대한 경외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동시에 두려웠다.


북한은 국가예산의 대부분을 김일성 신성화에 쏟아붓는다. 북한에는 곳곳에 '영생탑’이라는 석 골 기둥이 있는데 김일성 때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김정일 사후에는 이름이 하나 더 추가가 돼서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바뀌었다. 이게 김일성 김정일의 묘비 같은 거다. 북한은 지방 대도시는 물론이고, 나라의 어느 구석에 깊은 시골에도 '영생탑’이 있다. '영생탑’이라는 존재는 그냥 석조 기둥이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묘비이다. 묘비 하나를 만드는데도 돈이 많이 들 텐데, 나라 곳곳에 묘비를 세우려니 그 못 사는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인민들의 피땀을 짜냈겠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세워진 묘비의 역할이 뭘까?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다.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눈에 보인다. 사람은 보이지 않은 '신’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인 '인간의 신격화'를 훨씬 더 쉽게 믿는다.


밀라노 중심에 웅장하게 화려하게 버티고 있고, 그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붐비는 두 모오 성당 앞에서 오래 토록 서 있었다. 내 조국 북한은 외부의 도움이나 개입이 없이 그들의 힘으로 '내면화된 석 골 기둥’을 부술 수 있을까? 그래도 희망은 있다. 중세의 암흑기를 장식했던 가톨릭의 역사와 '신’의 이데올로기를 그래도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극복했다. 철통 같은 권력은 문화유산으로만 남기고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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