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는 혜성님 Oct 06. 2023

이탈리아 쿠네오 여행기 - 탈북자의 눈으로 본 유럽

올봄 아이들의 방학을 맞아 남편의 고향 이탈리아로 다녀왔다.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쿠네오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을 접하는 도시로, 풍부한 철광석과 유명한 와인으로 유명하다. 도시 한복판에서 보면 알프스 산 정상은 늘 흰 눈을 떠이고 있었다. 부드럽게 소복이 쌓인 흰 눈은 걸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정겨운 소리를 내며 알프스의 국경에도 봄이 왔음을 알려왔다. 프랑스와 이태리 국경은 평화로웠다. 하늘에 닿을 듯한 산봉우리들을 끼고 있는 협곡 사이로 국경선이 있었다. 프랑스 영토쪽에는 프랑스 국기가 걸려 있었다. 도보로 200메터 가량 이동하니 이탈리아 국기가 걸려 있는 건물이 있었다. 전에는 세관의 역할을 수행하던 건물이었다는데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 뒤로 넓은 공간을 확보한 듯한 큰 식당이 있었다.


남편 친가도 이탈리아에 있기도 하고 우리 식구들이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한다. 그리고 시할머님께서 돌아가시며 남겨주신 자그마한 주택이 하나 있는데 아기자기한 마당도 딸려 있다. 별도의 숙박비를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게 가장 큰 메리트이다. 작은 마당에는 한국 야채를 심었다. 그래서 더 자주게 된다. 올봄방학 때는 알프스 고사리도 참 많이 꺾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공룡이나 먹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그러면 뭐 어떠랴? 고사리가 천지에 널려 있는데 고사리 맛을 아는 한국 사람이 그걸 그냥 버려두기 아까웠다. 잔뜩 꺾어서 말려서 주변 한인들과 나눠 먹었다. 부드럽고 맛있었다. 알프스 산 고사리, 내년에도 기대하고 있다.


쿠네오는 프랑스 국경 근처 도시다 보니 사람들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프랑스어만 가지고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가끔 프랑스어가 안 통하는 상황을 맞닥뜨려도 괜찮았다.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이탈리아어가 수준급이다. 도시 분위기는 유럽의 어느 도시와도 같이 평온하고 사람들이 여유롭고 친절했다. 이탈리아는 유럽의 여느 나라들보다 인종차별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동양인에게는 관대했다.


국경에서 인접한 가장 큰 도시이다 보니 프랑스 번호판을 단차가 참 많았었다. 프랑스는 물가가 이탈리아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올해는 이탈리아 물가가 비슷하거나 다소 비쌌다. 상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탈리아는 프랑스보다 세금이 좀 저렴하다. 나는 원래 음식 외에는 소비를 별로 하지 않는 편이라, 이탈리아 갈 때마다 과자나 크래커 종류를 사재기해서 가져온다. 아이들이 이탈리아 과자를 참 좋아한다. "Mulino Biaonco"라는 이탈리아 식품 브랜드인데 이탈리아에서는 한국에 롯데나 해태 같은 국민 브랜드이다. 올해는 취미인 운동을 즐기기 위해 아식스 운동화를 35유로라는 저렴한 가격에 득템 했다. 일주일 세 번 엑상프로방스의 새벽바람을 가르며 아오지의 기운을 남프랑스에 뿌릴 때마다 요긴 나게 신고 있다. 뽕 뽑을 때까지 신을 요량이다.


유럽은 보통 7,8월에 큰 세일 시즌이 있다. 프랑스도 세일 시즌에 의류나 신발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우리 가정은 여름 방학을 주로 이탈리아에서 보낼 때가 많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프랑스 이태리 국경을 넘으며 나의 탈북 여정을 회상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두만강 상류는 우리나라 시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네 개울 크기만 하다. 어떤 곳은 돌다리로 건널 수 있을 만큼 적은 강물이 흐른다. 상류 쪽에 무산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북한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는 철광석이 생산되는 무산광산이 있다. 나는 무산지역으로 넘었다.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밟았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집집마다 마당에 세워 놓은 경운기였다. 그리고 푸르른 옥수수밭이었다. 성인 남자 팔뚝만 한 이삭이 옥수수 줄기마다 탐스럽게 붙어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산림은 푸르고 숲은 무성했다. 농가로 시선을 옮겨 보니 산 아래로 옹기종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우리네 농촌 모습과 사뭇 닮아 보이기는 하지만 집집마다 풍요의 향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내가 건너온 두만강 반대편 내 조국을 보았다. 내가 등진 고향이고 조국이지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어린 마음에도 서글픔이 내려앉았다. 앙상한 옥수수 줄기마다 가느다랗고 위태롭게 붙어 있는 옥수수이삭, 무너져가는 기와집들, 오래된 가난과 기약 없는 굶주림에 절망하는 사람들, 도시한 가운데 가운데 웅장하게 서 있는 거대한 “영생 탑”시뻘건 글씨로 휘갈겨 쓴 김일성 선전물, 저 볼품없는 조국도 다시 밟을 수 없는 땅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잠시 홀로 추억에 잠겨 있는 동안 아이들은 차 트렁크에서 큼직한 비닐봉지를 꺼내서 눈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들의 아빠와 아이들이 비닐봉지 위에 앉아 눈썰매를 즐겼다. 참 행복했다. 내 비록 소싯적에 고생은 좀 했지만, 그 고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일상이 더 달콤한 게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한국엄마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