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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Dec 05. 2023

유별난 '나' 다른 '나'

전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살아 낸 탈북자

전체주의 속에서 다름이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과 달랐다. 엄마는 나에게 자주 비슷한 말을 했다. '조선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바람 따라 돛 달아야 한다', '바람 부는 개털처럼 사는 게 지혜로운 거란다'나도 엄마의 조언에 동의했지만 대를 펴지도 않은 채,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강풍인가 약풍인가?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갈건가? 온통 이런 생각뿐이었다. 이런 내가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국가의 잔인한 정치적 폭력으로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잃은 후, 나의 아버지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또다시 자기 피 붙이를 정치폭력으로 인해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부탁이니까 우리 그냥 남들처럼만 살자. 다른 애들 뭐 하는지 잘 보고 똑같이 만 해라. 튀지 말아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러니 제발 두리뭉실하고 살자! 그냥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 믿어라.’


광란의 사춘기를 겪어내고 고등학교 졸업을 몇 해 남겨둔 어느 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너는 이 나라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웬만하면 여길 떠나 될 수 있으면 멀리로 가라. 그게 네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인 것 같다. 넌 학교 졸업해서 성인이 되자마자 여럿이 눈독 들이고 있을 거다. 넌 어떤 방법으로라도 정치범으로 엮여서 격리될 거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다르다는 것은 '반대한다’라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특수성이 덧 입혀진 전체주의 국가에서 딱히 내 세울 것 없는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돌연변이’가 나였다. 내가 특별한 아이는 아니었고, 사물과 현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해석도 좀 달랐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주체’들을 알려진 대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다는 뜻이다. 이건 '역적’이 될 소양을 애초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내 모습대로 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사춘기를 막 벗어나면서 나 스스로도 자각했다. 이 체제가 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정치범 수용소를 이미 예약했구나. 그 사회에 순응을 해 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일고등(특목고)도 가 보고, 대학 입시도 치르고…

그 사회에서 어떻게 하나 살아 내려고 내 손에 정을 억세게 움켜쥐고 내 마음 여기저기 두드려 대며 손봤다. 그럴 때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훅 치고 올라오는 묵직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가끔은 숨 막힐 듯한 정막 속 날 가둬 놓는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을 모두 억누르고 살아 낸다는 게 나에게는 죽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 대학 입시를 치르러 다닐 때 사회가 날 받아 준다면 타협하고 죽을 각오로 살아 내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평생을 원하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해 내며, 내 생각을 통제하고, 마음을 가두고, 입을 단속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속박하고 얽매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게 과연 살아 있는 걸까? 그래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고향도 등지고, 부모도 떠나서 탈북의 길에 올랐다.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자유를 선택했다. 그 길에는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었다. 망망대해에 고무튜브 하나 들고 '자유'라는 등불을 향해 그냥 몸을 던졌다. 그래도 절망과 암흑 속에 날 가두고 숨만 쉬면서 살아 내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미성년자였고 실패하더라도 법적인 처벌은 면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도 붙잡았다. 집을 떠나는 날 부모에게도 내 속 사정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사지에 내놓지 않는다. 동생만 붙잡고 이야기했다. 이 나라를 떠날 거고 다시는 안 돌아올 거라고…


중도는 없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선택해야 해. 아니면 빨갱이야


북한에서 도저히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리하던 내가 남한을 만났다. 북한에서 '유별나다’라고 부모에게도 골칫덩어리던 내가 만난 한국도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사회였다. 한국은 전체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내가 다른 생각을 품었다 한들 나의 신변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유롭다고 해야 될까? ‘유별난’ 내가 본 한국은 두 가지 의견만 존중되는 사회였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단 하나의 의견만 존중된다면, 한국은 그게 반대되는 의견까지 존중된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보면 좌파의 시각, 그리고 우파의 시각이 그것이겠다. 그런데 나는 제3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제2의 시각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은 제2의 시각까지는 허용되만, 그 외의 관점이나 생각은 ‘이단아’ 취급을 받는다.


탈북자가 '이단아' 취급을 받는다는 건 한국에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포지션을 똑바로 취하지 않으면 양쪽에서 다 버림받는다. 이건 생존 문제와 직결이 된다. 그래서 아무 데나 경제적 풍요를 약속하는 데에 나를 꾸겨 넣고 생존을 모색했다. 아무리 자신을 꾸미고 접어봐도 방심하는 순간 나의 본모습이 튀어나온다. 이게 과연 내가 찾은 자유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범한 여자들과 달랐다. 나는 하루 세끼 식량과 일주일에 한 번 마시는 맥주 두어 병 그리고 칩스 한 통이면 나의 생존에 필요한 대부분이 채워진다. 나는 가방도 구두도, 그리고 최신 유행 패션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 내가 한국에서 '적응’해서 섞여 살려니, 나의 금쪽같은 자유 시간들을 투자해서 벌어들인 소중한 돈들을 남에게 보여주는데 대부분을 써야 했다. 나는 내 음식값과 맥줏값 외에는 필요한 게 없는데,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시선 때문에 숱한 돈을 의무적으로 써야 했다. 인간이 먹고 입고 사는데 사실 이렇게 많은 돈과 물건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 근데 한국에 살면 남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돈을 안 쓰고 살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 그렇게 살면 사회생활이 안 되거나, 초월적인 멘털을 장착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대하다. 나를 절대로 궁지로 밀어 넣지는 않는다. 여러 번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 어차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붙들고 있어 봤자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한국의 주류 생각과는 사뭇 다른 가치관인데, 나는 이 가치관 덕분에 북한에서 나 올 수 있었고, 여러 번의 삶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북한을 떠나서 볼꼴 못 볼꼴 다 보고 목숨 건졌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얼마나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나를 옭아 매야 하나라는 반항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뼛속까지 자유롭다.


프랑스에 오니까 한국에서처럼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심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자유함이 있다. 여기서는 나는 나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다. 나를 꾸밀 필요도 없고, 나를 드러낼 필요도, 그렇다고 감출 필요도 없다. 그냥 나는 나로서 여기서 숨 쉬고 존재한다. 나는 어디에도 얽매어 있지 않다. 나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좌파든 우파든 눈치 볼 필요가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소중하게 보듬고 지킨다.

나는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나 보다.


그래서 행복한가?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회한의 웃음을 짓네.

삶이 '고행'이 아닌가? 행복하려고 사나? 그냥 그땐 그렇고 싶었고, 그냥 그래서 사는 거지.

음... 그래도 나는 '나'라서 좋고, 다시 태어나도 '내 인생'을 선택할 것 같다. 많이 배웠다.

신이 나에게 '내 삶을' 다시 살아 볼 기회를 준다면 그땐 다른 선택을 해 볼 거다.



프랑스 살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뭘까?


가끔씩 훅 치고 들어 오는 인종차별이 있구나.

하긴 어디서는 차별을 안 받았나?

괜찮다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내가 떠 메고 살아야 할 내 삶의 무게겠지

그나마 여기가 가장 낫지 않나


아....... 그리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도 있구나.

가끔은 고향에서 나던 들풀 한 포기도 그리울 때가 있다.

이제는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없겠지.

다시 만날 수 없는 피붙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 동정, 그런 것들도 있네..


이 자유함을 품고 고향땅에서 피붙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면 그곳은 천국일 거야.

우리가 약소국이라 이런 설움을 겪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가 자처한 것일까?


다들 잊어 가고 있는 것 같던데.

우린 이렇게 영원히 따로 살아야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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