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회상,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남프랑스까지
작은 행복에 불행의 흔적을 묻으며
남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꼽으라면 봄이라고 하겠다. 라벤더 꽃이 흐트러지게 피는 7월의 여름도 아름답지만 내가 단연코 사랑하는 계절은 봄이다. 나는 늘 그랬다. 봄이 좋았다. 북방의 겨울은 혹한이다. 산이고 들이고 사방이 눈으로 뒤덮여 있고 계곡은 꽁꽁 얼어 있다. 추위가 얼마나 가혹한지 일메터가 넘는 투명한 얼음 밑으로는 다가오는 추위를 미처 피하지 못한 물고기 떼들이 오도 가도 못 한채 그대로 얼어붙어있는 것도 보였다. 매서운 추위는 말라비틀어진 풀잎 하나 남기 않고 삼켜 버린다. 북한의 겨울에는 굶어 죽는 사람보다 얼어 죽는 사람이 많은 계절이었다. 겨울이 너무 싫던 나머지 봄을 그토록 좋아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뼛속까지 얼어붙는 혹한기를 잘 버텨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남프랑스의 봄은 온갖 꽃들이 만개하는 계절이다. 울창한 푸른 소나무 숲 사이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 한 새 빨간색 coquelicot (개양귀비 꽃) 꽃들이 피어나 세상을 붉게 수놓는 계절이 다가왔다.
벤치에 앉아 내 발밑에 카펫처럼 깔려서 곱게 피어는 이름 모를 하얀빛 노란빛, 보랏빛 들꽃들을 보노라니.. 따듯한 봄 햇볕이 내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다. 나는 한국에서는 태양을 싫어했다. 자외선은 피부의 적이라는 말을 듣고 온갖 크림에 선크림에 화장을 떡칠을 하고도 햇빛을 피해 다녔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만, 한국만큼 외모가 전부인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며 탈북했던 친구들이 힘들게 모은 피 같은 돈들을 들고 성형외과로 드나들었다. 나도 한국의 외모지상주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나의 불행했던 과거, 고립된 것 같은 외로움, 초라한 나의 현실 모든 원인은 내 외모가 못 나서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경험 있는 친구들을 따라 성형외과로 향했던 적 있었다. 세포 속까지 침범한 나의 지긋지긋한 촌스러움을 벗어 버리고 한국여성들처럼 세련된 화장에 예쁜 외모를 만들면 한국 남자친구도 사귀고 여느 한국여성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품었던 것 같다. 성형외과에서 상담을 받다가 갑자기 코도 세우고 쌍꺼풀도 만들면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흘러서 외모가 바뀌어 있을 나를 엄마가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라는 마음이 들어 그만두었던 기억이 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나는 투명하고 하얀 피부를 만들고자 햇빛을 피해 다니고 두꺼운 화장으로 내 얼굴을 뒤덮었다. 화장으로 피부의 숨구멍까지 뒤덮었던지 나의 얼굴에는 두드러기가 곳곳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와서 보니 이 나라 여성들 중에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는 여자들도 많다. 프랑스 여성들은 화장기 없는 얼굴, 주름진 얼굴,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 얼굴들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닌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내 얼굴을 두껍게 뒤덮었던 분칠들을 벗겨 냈다.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얼마나 더 이뻐지겠다고, 얼마나 더 젊게 살겠다고 이렇게 아름답고 따듯한 햇빛 그토록 피해 다녔을까? 공원 벤치에 앉아 화장기 없는 나의 얼굴을 봄볕에 맡기니 평화로웠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천국일 거야 싶을 정도로 안락했다. 이렇게 편안한 기분을 어디선가 느껴본 것 같았다.
내 나이 열네 살 때였다. 혹한기가 지나고 내 고향의 양지바른 곳에는 겨우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맨땅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 동생과 함께 양지바른 들판들을 돌아다니며 언 땅을 뚫고 제일 먼저 얼굴을 내미는 냉이 풀을 찾아내어 뿌리까지 캐내어 삶아 먹으며 끼니를 이어갔다. 늘 먹을 양식이 부족했던 우리 집과는 달리 할머니네 집으로 가면 강냉이(옥수수)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강냉이에 콩을 섞어 닦아 낸 강냉이 볶음도 간식으로 먹을 수 있었다. 탈북하기 몇 해 전 3월 말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40분 거리에 살았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강냉이밥에 깍두기를 배부르게 먹고 사촌 동생들인 영미, 윤미, 설미, 그리고 나와 내 동생 전옥까지 함께 따듯한 남쪽으로 향해있단 구새 모퉁이에(굴뚝 주변) 우르르 모여 앉아 온 동네 떠나라가 웃고 떠들며 강냉이와 콩을 섞어 볶은 것을 한주먹씩 쥐어 입에 한 알씩 집어넣고 씹어 대면서 이른 봄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흠뻑 받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는 배만 부르면 소똥 굴러다니는 것도 웃기고, 낙엽 떨어지는 것도 우리 다섯이 함께라면 그보다 더 재미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삼촌의 아내인 삼촌엄마(작은어머니)가 딸만 셋을 낳은 게 그토록 못마땅했던지... 우리 다섯 여자아이들이 모여 큰소리로 웃고 떠들 때면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며 '아이고 저것들 중에 하나만 살덩이를 하나 더 달고 나왔으면' 하면서 혀를 끌끌 차며 작은엄마를 나무랐다. 옆에서 듣고 있던 우리 엄마는 꼭 한 마디씩 거들며 작은 엄마 편을 들었다. '아이고 엄마! 그런 말 어디 가서 하지 마오. 할아바이가 정치범으로 붙들려간 역적 집안에 살덩이 하나 더 달린 남자애가 나오면 그건 저주요. 무슨 왕족도 아니고, 그 무슨 대단한 핏줄이라고 대를 잇기는 뭘 잇는다고... '라고 면박을 주면 할머니는 문 쾅 닫든, 그릇을 쾅하고 내려놓든 아니면 한 번씩 마른 가래를 떼든 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우리 다섯 손녀년들은 할머니가 그러거나 말거나 동네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며 떠들어 댔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되면 할머니네 옆에 집에 살던 광석이고, 앞집에 살던 은복이도 담장을 에둘러친 뜯어진 널판자를 하나 옆으로 밀고, 우리 할머니네 집에 놀러 와 양지쪽 구새 모퉁이에 앉아 강냉이 콩 볶음 나눠먹고 봄 햇볕 쬐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북한에서 살 때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인간은 지옥 불구덩이에서도 유머를 개발하고 웃고 떠들며 고통을 견뎌내고 작은 행복에 불행의 흔적들을 묻으면서 그렇게 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인간이 행복함을 느끼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이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어쩌면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보면 그렇게 어렵다는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구식이고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다. 나는 왜 이렇게 옛것들을 못 버리고 살아갈까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있다. 글쎄 모르겠다. 나의 이런 고집스러움은 남한에서 살아가기에는 생존의 문제 걸려 있을 만큼 무조건 버려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한때 잠깐 회사를 다닌 적이 있는데 부장님은 나의 외모를 보고 북한에서 엊그제 넘어온 사람 같다고 했다. 부장님은 나에게 옷도 좀 사고, 머리에 염색도 하고 세련되게 꾸미고 다니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조언이 못 견딜 정도로 싫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한때는 멋스럽고 고급스러운 물건을 소유하고 싶었다.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홀로 남한으로 넘어와 산전수전 겪어 내며 철이 일찍 들어 버렸다. 나는 그다지 양심적이고 이타적인 사람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북에 있는 부모를 먹여 살리다 못해 삼촌이 남겨놓은 혈육들인 사촌들의 혼수까지 내가 챙기게 되었다. 부모님 옥수수밥이라도 배곯지 마시라고 나름대로 효도를 한답시고 보낸 돈들이 부모님 손을 거쳐 사촌들까지 거둬 먹이게 되었다.
그 소리를 듣고 속이 뒤집어져서 두만강을 넘어 중국 대륙을 건너 간신히 연결되는 전화기를 붙잡고 남조선이라고 땅 파면 돈이 나오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돈이 쏟아지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사촌들까지 신경 써야 하냐고 이럴 거면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은 적도 있다. 내가 머리 한번 안 하고, 가방 하나 안 사고, 구두 한 켤레 안 사면 고향에 사는 부모 호강은 못하더라고 밥은 굶지 않는데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버텼던 것 같다.
고향에서 전화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가족들 걱정 때문에 속병이 날 것 같고, 전화가 오면 오는 대로 통장을 박박 긁어 보내야 하니 전화가 안 왔으면 싶다가도 그래도 나는 배는 안 곯지 않냐.. 그 땅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서는 내가 희망이 되어줘야 그들도 살아갈 용기를 얻지 않겠나 싶어서 '돈 떨어지면 꼭 와요. 살아갈 방법이 나 지지 않으면 연락해요. 많이는 못 보내요. 200만 원 까지는 보낼 수 있어요.'라고 희망을 얹어서 전화를 끊곤 했다.
그 애증의 전화도 못 받은 지 꽤 오래됐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인류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준다고 우리는 배웠지만, 북한은 사정이 다른 것 같다. 스마트폰의 보급, 과학기술의 발전이 독재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인민들을 옥죄고, 숨도 못 쉴 만큼 빈틈없이 통제하게 되는 것 같다. 아름다웠던 두만강변을 따라 전기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감시 카메라와 각종 첨단 전화 탐지기들이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으니 가족들과 전화 한 통 나누는 게 혈육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아야 할 지경이다.
나도 이제 나를 꼭 닮은 두 아이들이 있으니 고향에 있는 피붙이들보다 내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고향에 홀로 남은 엄마를 버리려고 했던 건 아닌데,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포기하게 된다. 엄마가 불쌍하고 가엽다. 내 엄마여서 핏줄이어서 그래서 특별히 마음이 쓰여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인생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분단의 상흔을 끌어안고 생가슴에 피를 철철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들 잊으라고만 한다. 내 부모형제들이 어떻게 잊힐까?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한다고 해도 결코 몰랐던 사람들이 될 수가 없는데, 다 잊고 현재만 누리며 그렇게 행복하게 살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을까? 노력하면... 그런데 남겨진 사람들은.. 나는 그냥 살고 싶어서, 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과연 나는 소원했던 것처럼 자유로울까? 내 핏줄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내 발밑에 깔고 살아남은 것 같다. 세상에 우리 조선 사람들만큼 불행한 민족이 어디 있을까? 프랑스에 살면서 가난한 나라에서 온갖 불행 덩어리들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우리 북한 사람들이 탈북자들이 제일 불쌍한 것 같다..
친가 외가 줄줄이 딸만 들만 쏟아져 나오는 통에 친할머니 외할머니 염원이던 아들을 통한 대 잇기는 끝났구나 하고 포기할 무렵 툭 튀어나와 온 가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우리 집안의 유일한 남자 수원이, 내 아버지 무덤에 나를 대신해 술 한잔 부어주렴! 내가 널 참 많이도 질투했고 미워도 했었는데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었더라면 좀 잘해줬었을걸 하는 후회도 된다. 사촌누나인 나의 탈북으로 인해 개나 소나 다 가는 군대도 못 가고 아오지 탄광에서 탄 이나 캐고 있겠구나...
때로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죽지 말고 잘 살아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