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승리』서평
예외 없이 필멸성을 타고난 인간이 예외적인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책이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은 앞서 간 이들이 이뤄놓은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지식과 제도를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이 축적 결과가 오늘의 과학 기술과 사회제도다. 책을 통해 선조의 지식이 저장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제자리걸음만 했을지 모른다.
따라서 독서만큼 날로 먹는 게 없다. 독자가 아닌 저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저자는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기존 지식을 재조합해 구조화하고 자신의 통찰을 가미하느라 읽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다. 양서일수록 더욱 그렇다.
반면 기존에 이미 나와있는 책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들로 채워진 책들도 많다. 나는 내가 날로 먹는 책이 좋지, 저자가 날로 먹는 책은 싫다. 2024년 한국에서 발행된 책의 종수만 해도 6만 4,306 종이 넘는다.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 그래서 양서가 소중하다.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신간도서 메일링 서비스를 신청하면 엄선된 신간도서를 개인 메일로 추천받을 수 있다. 『연구소의 승리』가 이곳에 실렸다.
『연구소의 승리』는 기존에 다루지 않은 내용을 다룬다. 책의 참고문헌 항목 개수가 131개가 넘고 그중 대다수가 해외 자료들이다.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을 담은 책들과는 다르다. 날로 먹는 책을 접할 때와는 달리 『연구소의 승리』와 같은 책을 만나면 나는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저자의 정성에 감사하며 읽는다.
『연구소의 승리』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연구소의 탄생과 성장을, 2부에서 연구소의 재도약과 후발주자들의 추격을, 3부에서 협력하는 연구소들의 변화된 양상을 담았다. 1부에서 독일의 제국물리기본연구소 등 국가의 강력한 권한과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성정 한 연구소의 활약이 자세히 나와있고, 2부에서는 패전 이후 독일 막스플랑크협회의 재도약과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추격 등이 담겨있다. 3부에서는 팬데믹, 우주 탐사, 기후 변화 등 과학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거대화됨에 따라 연구소가 국가 간 경쟁을 넘어 전지구적 협력의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2부의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탄생비화가 인상 깊다. 1956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66달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1인당 6000달러를 들여 4년 동안 총 150명의 수재들을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국제원자력대학교로 유학 보냈다. 이는 훗날 한국이 원자력 기술강국이 되는 밑거름이 된다. 또한 1966년에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한국의 산업화에 어떻게 이바지했는지를 보면 연구소와 국가는 서로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고 발전했음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례 없는 발전을 이뤄낸 한국에서는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하는 데 연구소가 충추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3부에서 알 수 있듯 연구소의 역할과 함께 연구소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전지구적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공존과 진보가치가 과학분야에서 더욱 중요하다. 카이저빌헬름 협회나 미국국립과학재단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는 과학자들의 열정을 제도화하고 기초과학 연구에 대해 효율성을 강조하기보단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기초과학은 혁신의 시드머니다. 단기적 시각에서 비롯된 기초연구 투자의 불확실성을 정부가 시스템으로 보완해야 한다. 정부는 비전에 맞게 자본을 투자함과 동시에 연구소의 자율과 권한을 존중해줘야 한다. 정부는 자원을 집중 배분하는 강력한 힘을 제공하고, 디테일은 전문가인 연구소에 맡긴다. 노벨상 받고 싶은 사람은 오지 말라는 기초과학연구원의 국가주도 연구소 초기 운영 기조는 이제 부적절하다. 빠른 성장과 경쟁 승리는 국가의 응용과학 집중 투자에서 나왔을지 몰라도 인류의 공존과 진보는 기초과학에 대한 과학자들의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구소의 승리』는 연구소 역사만 다룬 책이 아니다. 그랬다면 인류 문명으로 첫 문장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소의 역사는 소재일 뿐이다. 이 책은 연구소를 통해서 각 시대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발전된 과학기술이 산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폭넓게 담고 있다. 또한 연구소가 당시 정치적 상황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역동적으로 서술했다.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전개한 서술을 읽다 보면 사회에서 연구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위상을 가져야 하는지 저자의 문제의식에 자연스레 고민하게 된다. 또한 연구소가 기관을 넘어선 사회적 제도로서 기능한다는 사실과 역동성을 발현할 수 있도록 연구소의 자율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위와 같은 식견과 더불어 『연구소의 승리』는 통찰을 준다. 단순히 코펜하겐 이론물리연구소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1921년 아인슈타인, 1922년에 닐스 보어가 받은 노벨물리학상이 물리학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서술한 부문이 적절한 예다. 단순한 사실 나열을 넘어 이 챕터에서는 결정론적 세계관인 고전물리학의 시대가 저물고 불확실성과 확률론적 세계관을 근간으로 하는 양자역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사적 전환을 보여준다.
또한 『연구소의 승리』는 문장이 깔끔하고 흐름이 자연스럽다. 『연구소의 승리』문장들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해서 난해할 수 있는 과학과 역사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앞서 말한 코펜하겐 이론물리연구소가 담긴 18장에서 저자는 1922년 베르사유 체제 붕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공산국가 소련의 등장과 더불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통해 당시 불확실한 시대상을 언급하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했다. 사실 이 책은 서문부터 흐름이 좋다. 연구소 부정적인 인식-그 이유-연구소 의미-해외 사례-우리나라 현실-연구소가 나아가야 할 길로 이어지는 서문은 저자가 이 책을 얼마나 공들여 썼는지 보여주고 시작한다. 이런 정성은 불확실한 투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20장에서도 드러난다. 저자는 과학투자에 대한 단기적 시점의 부적절성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국립과학재단이 미국 상원의원 윌리엄 프록스마이어가 만든 황금양털상을 수상했다는 사례를 언급했다.
책을 읽으며 2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내가 참고문헌 131개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첫 번째고, '내가 참고문헌 131개를 개별적으로 다 읽었다 하더라도 이 책 한 권을 읽은 것만큼 식견과 통찰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두 번째다. 물론 둘 다 아닐 것이다. 모두 저자의 노고 덕분이다. 저자 배대웅 님께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