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를 얹은 사워도우와 아리차로 내린 커피를 들고 온 서재 창문에 결로가 보인다. 나는 평온한 일상만으로 큰 만족을 얻는다. 외부 자극이 굳이 필요 없다. 휴가와 빵, 커피 그리고 책이면 충분하다. 도파민보다 아세틸콜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의 특징이다. 아세틸콜린은 신경세포에서 분비되어 학습, 집중력 향상 및 근육 수축, 심장 박동 등 신체 기능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대신 일상의 평온이 깨지면 그만큼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휴가 중 업무 연락을 받은 직후엔 감정은 일시적이라고 되뇌며 심호흡을 해야 한다.
겨울 평일에 집에 있으니 방학 같다. 내겐 계절을 대표하는 시절이 있다. 각 계절이 주는 분위기와 감각적 이미지가 있다. 겨울은 특히 분위기가 다양하다. 크리스마스와 구정까지의 겨울은 아늑하고 풍요롭다가 구정 연휴가 지나면 앙상하고 쓸쓸하다. 연말연시의 눈과 구정이 지나고 난 뒤 내리는 눈은 다르다. 봄이 올 때까지 쭉 적막하다. 볕이 좋은 날씨도 왠지 어색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코끝에 시원한 탄내가 나기 시작하면 90년대 유년시절의 포근함이 떠오른다.
방학 아침에는 등유난로 냄새가 먼저 났다. 카펫 위 이불속에서 귤도 까먹고 위인전도 읽었다. 점심 먹고 날이 좀 풀리면 동생과 마당에서 팽이를 돌리거나 집 앞에서 농구를 했다. 며칠 지나면 크리스마스가 왔다. 지상파에선 번갈아가며 <나홀로집에> 시리즈를 방영해 줬다. 플라자 호텔은 볼 때마다 화려했지만, 케빈과 부딪힌 사람이 누군지는 몰랐다. 그가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는 것도 역시 몰랐다. 96년 겨울엔 온 세상이 캔디였다. 개학하면 인기가 사그라들진 않을까. 기우였다.
간식으로 먹은 샌드위치도 생각난다. 구운 식빵에 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은 드레싱 소스와 슬라이스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였다. 우유와 잘 어울렸다. 어머니가 가끔 튀겨주시는 감자칩도 맛있었다.
평온한 일상만으로 큰 만족을 느끼는 것은 평온한 유년시절 덕분이다. 그 시절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갑작스럽게 내 일상을 침범하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집 담벼락에 손수 설치해 주신 농구 골대와 어머니의 토스트가 다 막아주었겠지. 지금은 내 취향에 맞는 사워도우와 커피와 더불어 주체적인 내 공간도 있지만 일상의 균열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결국 회사에 나간다. 유관 기관에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 듯이 연락을 해댄다. 나는 그들이 이 정도 일들을 가지고 왜 급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퇴직 때까지 이해 못 하겠지. 내가 기한 내 처리하기로 한 일을 안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내 일상을 침범한다. 언제쯤이면 휴가 중 회사와 단절될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을까. 90년대를 회상하며 심호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