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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Mar 04. 2023

일상 여행

봄을 걷다.

화요일 후쿠오카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입직한 지 1년이 을 무렵, 지원근무가 끝난다는 얘기를 들 직후였다. 수요일 하카타역 근처 숙소를 예약하고 목요일 틈틈이 후쿠오카에서 먹을 다섯 끼를 정했다. 무채색 지옥. 드디어 끝나는구나. 금요일 청주공항 비행기를 탔다.


반신반의하면서 두꺼운 외투를 챙기지 않은 것은 끝내 잘한 일이었다. 이튿날 1월 20일 후쿠오카에는 봄이 먼저 와 있었다. 느지막한 아침을 먹은 초밥집에서 도보 이십 분 거리 때마침 노천탕이 있었다. 봄을 걸었다.   


무채색으로 변하고 계절이 사라질 때마다,

봄을 걸으며 들었던 음악을 듣고 찍은 사진들을 봤다.

노천탕에서 울컥 마음으로 바라본 봄하늘을 떠올렸다.


삶이 내 맘 같지 않다고 부리는 투정은 무의미하다.

정방향으로 가는 삶이 얼마나 있겠는가. 삶의 대부분은 그럴 수도 있는 것들이다.

삶이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꺾고 방향을 지나쳐, 정반대로 빨려 들어갈 때 일상은 지옥이 된다.

매 순간 나는 옅어짐으로써 비참다.

자주 떠났다. 어디를 갔다기보여기를 떠났다.




일상을 되찾은 뒤 여행 욕구가 사라졌다.

굳이 떠나지 않아도 된다.

<Aruarian dance>를 후쿠오카에서 듣지 않아도 봄이 충분하다.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


주말에 장을 보러 갈 때, 점심을 준비할 때마다 주로 듣는 음악들이 있다. 일상의 순간마다 감성묻어 있다. 계절이 달리 주는 정취가 있다. 내게 일상은 그 자체로 여행이 된다. 지옥이 아니라면. 정반대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금요일 밤 주말 뒤에 숨어 읽은 <책도둑>의 먹먹함은 이불속 온기로 기억된다.

주말 오후 집에서 보는 영화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볕, 커피, 수플레 팬케이크를 남긴다.

일요일 아침 <Family Guy>와 아포가토는 십수 년 전 리자이나의 가을을 불러온다.


오늘은 어떤 발자국으로 남을까. 다시 봄을 걷는다.

 

... 그렇다면 과거에 이미 들어본 소리와 이미 맡아본 냄새가 다시 느껴지도록 하자.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껴지도록 하자... 시간의 질서로부터 해방된 한순간이 바로 그 한순간을 의식할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시간의 질서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되살린 것이다.

마르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 영감을 준 음악 : Nujabes의 Aruarian dance

https://www.youtube.com/watch?v=vR-UqOPqG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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