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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May 27. 2023

이십삼 년만의 재회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동네 가수로 유명했던 우리 할머니의 최애곡은 김명애-도로남이었다. 대중음악에 눈 뜨기 전 나에게도 저 가사는 너무 신박했다. 랩가사였다면 쇼미더머니에서  ALL PASS를 받았을 펀치라인이다. 있는 힘껏 심각심사위원들은 검은 가죽 소파 등받이 위에 걸터앉아 호으우쓑~~ 요란을 떨었겠지.


세월이 찍은 점 하나를 지워내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분 중학교 2학년 때 내 담임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나를 포함해 유사인류가 대부분인 남중으로 첫 발령을 받으셨다. 아이유 마저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다고 했다가 돌연 물기 있는 여자가 될 거라고 갈팡질팡했던 스물셋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들은 꾸준히 문명인이 아니었고 선생님 말다채롭게 알아듣지 못했지만, 선생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우리 반은 물 본인이 담당 5개 반 아이들의 이름과 번호를 다 외우시면서 영어를 가르치시고 인격을 갖추도록 지도해 주셨다. 수업 내용이 어려워 못 따라오는 아이가 있을까 봐 따로 보충학습 문제를 내주시고, 영어에 흥미를 붙이라고 외국인 친구와 영어펜팔 주고받기 과제를 내주시면서 새벽 세네시까지 첨삭하고 출근하셨다. 우리가 사고를 치고 말썽을 피우고 통제불능인 날엔 화도 내셨다. 아무리 속상해도 교사인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화를 내서는 안 됐다며 미안하다고 우시기도 하고. 수학여행 코스로 지리산을 등반할 땐 손을 꼭 잡아주시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들 다 알았다. 어떤 선생님이 우리를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쓰시는지. 그리고 어른이 되고 직장인이 된 지금의 나도 안다. 직장인이 열의를 쏟아가며 가욋일을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내가 선생님에게 배우고 난 이후 갖게 된, 어른이나 교사 대한 기준이 사회 현실에 비해 얼마나 엄격한 것인지.


이번 스승의 날찾아뵙고 싶다고 선생님께서 근무하시는 학교에 메모를 남겼다.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같은 회신문자 왔다. 한결같으시다는 생각을 안고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다시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앞에 앉은 장성한 내가 너무 대견하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 모습이 보인다고 하셨다. 본인이 다시 스물셋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찾아와 줘서 너무 고맙다고 하셨다.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도 선생님의 2000년은 나보다 더 또렷했다. 교실이 몇 층 어디였는지, 공사 중이었던 학교 시설은 어땠는지, 우리 반에 또 누가 있었는지, 다른 반 담임선생님들은 누구셨는지, 수많은 제자들을 만나 보 선생님께서 오히려 추억을 채워주셨고 기억을 바로 잡아주셨다. 진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8월에 다시 만나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때는 선생님이 된 친구들과 함께 갈 예정이다. 선생님께서는 매년 시간 내서 찾아와 주지 않아도 되니 간간이 연락을 면서 다시 닿은 인연을 이어나가자고 하셨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내가 더 감사한 게 맞다. 장난 같은 이십삼 년을 거쳤음에도 꼭 한번 찾아뵙고 싶은 선생님을 둔 제자는 아무나 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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