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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허망하고 애틋했던 나의 첫 번째 지구와의 이별 (사직서)

by 이가은

나는 아랍에미레이트 승무원이다.

두바이에 거주 중이며 4년 이상 승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사직서를 냈다.


아랍 에미레이트 승무원으로 비행을 하며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사람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정을 나눴던 사람들 그리고 서로의 삶을 응원해 주던 스쳐 지나간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인연으로 남았다. 전생을 믿지 않지만 서로의 전생이 궁금해질 만큼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이런 인연들을 만들어내는 비행이 언제나 소중했다. 여전히 소중하다. 물론 다양한 진상승객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만든 화살을 막아준건 다름 아닌 따뜻한 승객분들이었다. 대략 700번이 넘는 비행. 1400번이 넘는 이륙과 착륙이 만들어낸 추억들이 나의 마음 안에 쌓여 지구를 만들어냈다. 지구라는 행성을 돌면서 만든 추억들을 보관한 나만의 지구를 손에 넣었다.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아랍에미레이트 승무원을 꿈꾸기 시작했다. 8년이 지난 지금 그 꿈을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낯선 나라에 도착한 후 몇만 걸음을 걸으며 본 세상은 새로웠다. 다시 두바이로 돌아가는 비행을 하기 위해 호텔에서 유니폼을 입을 때는 매 순간이 설레었다. 어릴 적 나의 상상에 존재한 나의 모습이 실현되는 현재가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셀레이는 감정이 만든 착각이 가끔 상처를 치유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시간이 흘렀고 설레는 감정을 누를 만큼 강한 이성적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흑과 백. 장점과 단점. 여행을 하며 돈을 번다고 느껴지는 빛나는 직업의 그림자를 보기 시작했다. 이 직업을 시작하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체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직업은 '외로움'이 언제나 따라다닌다. 특히나 외항사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더더욱 그렇다. 스케줄이 늘 맞지 않아 한 달에 한번 겨우 보는 친구들. 두바이와 멀리 떨어진 한국에 거주하는 가족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웃을 일이 1년에 한 달이 되려나.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생활한다. 모순적이게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동시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기도 한다. 한 번에 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장시간 대하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외롭다며 소리치는 게 스스로도 모순적이라며 혀를 찰 때가 많았다.


이 직업을 선택하는 이유가 단지 '여행' 때문이라면 1년도 힘들 수 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하면서도 '여행'이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딘가로 떠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지구의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싶었다. 보통은 고된 비행을 끝내고 도착한 나라에서 즐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다음 비행을 위한 컨디션 조절을 늘 생각해야 한다. 24시간 스테이를 기준으로, 24시간이란 공항에서 호텔까지 그리고 호텔에서 다시 공항까지 시간을 합한 것이다. 잠에 드는 시간을 빼고 나면 겨우 5시간도 남지 않게 된다. 그 좁은 비행기에서 만 걸음을 걸을 때가 많은데, 터질듯한 다리를 끌고 다시 여행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결국 이기는 건, 어쨌든 그 나라에 잠시라도 여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점들을 사랑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들을 사랑했다.


나의 구글지도 위 대부분의 나라에 여러 아이콘으로 표시가 새겨져 있다. 각 나라 별 맛집들이나 가보고 싶었던 장소들을 표시했다. 이 책이 쓰인 계기도 구글지도였다. 어느 날 잠이 들지 않던 밤, 우연히 구글 지도를 펼쳐 가고픈 여행지를 고르고 있었다. 당장 가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 가게 될 여행지를 고르고 있었다. 지구를 몇 번을 굴려도 가고 싶은 나라가 딱히 없었다. 어쩌면 가고픈 곳이 너무 많아서 고르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구글지도를 손가락 두 개로 굴리며 지루한 한숨 소리만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보다 지구가 작다고 느껴졌다. 이렇게 큰 지구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여겨졌다. 마치 이 지구를 손안에 가득 넣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감정. 그 감정이 이 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며칠 전 다녀온 푸껫의 해변에서 노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 지구를 놓기로 결심한 후 다녀온 여행지의 노을이었다. 오백 원 동전만 한 해가 떨어져 바다를 삼키고 있었고, 노을색으로 물든 새빨간 바다의 파도가 내 옷을 전부 젖게 했다. 예상치 못한 파도에 눈물이 났다. 아니, 그 순간의 전부가 나를 눈물 나게 했다. 벅차오름. 벅차오른 눈물이 분명했다. 이 지구를 떠나보내는 애틋한 감정과 불완전하지만 새빨간 새로운 꿈이 생각나서일까. 해변에 한참을 멍하니 몇 번의 파도를 마주하며 스스로 질문했다.

'나는 그 노을을 죽기 전까지 몇 번을 더 보게 될까'

아름다운 것들을 죽기 전까지 백번도 보지 못하는 건 너무나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다시 다짐을 했다.

'나의 소망을 무시하지 말자. 찾아오는 새로운 꿈들을 환영해 주자. 그렇게 죽기 전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손에 넣어버리자.'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나를 성장시켰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 어릴 적 친구와 10년 뒤 꺼내보자며 모래 속에 묻은 종이 조각 같은 것. 영원히 찾아내지 못할지 모르지만, 추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애틋한 것. 이 직업은 나에게 그런 존재다.


어쩌면 내가 손에 넣은 지구는 '나'였지 않았을까?

승무원으로 비행을 하며 빛났던 순간들 마다 존재한 내가 만들어낸 '나'라는 지구를 손안에 가득 넣었고, 그런 나를 떠나보내주기로 결심했다.

또 다른 지구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기억들로 가득 채우기까지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테지만, 두렵지 않다.


이 작은 지구에서 우리가 못할 건 없다.

우리들의 존재가, 우리들의 꿈이 이 지구를 손에 넣어버릴 만큼 아주 크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만의 지구는 이별과 만남으로 영원히 우리의 어딘가에 안겨있을 테니.




이번 주 일요일부터

'향수병 해부학'이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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