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넣은 첫 번째 지구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몇 번의 이륙, 몇 번의 착륙. 그 몇 번들이 쌓이고 쌓여 몇백 번을 만들어냈다. 대개는 설레었고 종종 힘들기도 했다. 나의 이름을 상냥하게 불러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름표를 가로채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각 나라별 욕을 들어보기도 했고, 한국의 문화권에서 할 수 없는 모욕적인 제스처들도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가볍게 무시할만한 크기의 상처조각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한 마음으로 일 하는 것은 여전히 설레기만 한다.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오히려 '나'를 찾게 되는 진귀한 경험도 하게 된다. 승객과 승무원의 위치는 어느샌가 허물어지고, 대화의 공기는 따뜻해진다. 그래서 오히려 장거리 비행을 좋아할 때가 있다. 바쁜 서비스를 끝내고 동료들과 그리고 승객분들과 대화할 시간을 가진다는 건 나를 들뜨게 한다. 어느 비행에서 승객으로 탑승했던 부사무장이 나에게 찾아와 이야기했다.
"너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꼭 오래 일 했으면 좋겠다."
솔직하게 '천직 승무원'이라는 말을 들을 때 기쁘지만은 않다. 놓으려는 끈이 손 목에 다시 묶여버리는 답답함이 들기도 한다. 이 직업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직업이 잘 어울린다는 건 가장 큰 칭찬이다. 하지만 어느샌가 나의 지구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칭찬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가족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비행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 스스로 조차 '천직승무원'이라며 미화시켰다. 어쩌면 나를 칭찬하는 주변 사람들과 그동안 승무원을 준비해 온 과거의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나 보다. 나는 천직승무원이 아니라는 걸 결코 들키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이뤄낸 꿈을 허무는 일은 오래된 애착인형을 버리는 일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허망하고 애틋했다.
비행기에서 일을 하며 나의 루틴은 깨져갔고, 4년간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나는 올해부터 매달 아프기 시작했다. 커피를 끊고 말차를 마시기 시작했지만 나의 위염은 여전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속이 따끔거린다. 앉아서 밥을 제대로 먹은 적이 별로 없는 탓인 걸까. 아니면 바쁜 탓에 샌드위치를 한 입에 구겨 넣었던 습관 때문일까. 요즘은 비행에서 돌아오면 14시간을 그대로 자버린다. 딱히 힘든 비행이 아님에도 피로가 잘 가시지 않는다. 겨우 4년 했다고 무슨 건강이상이야? 라며 나를 허약하게 볼 사람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무너진 탓이 가장 클지도 모른다.
타국에서 승무원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안되었을 때, 난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모든 아침이, 모든 노을 진 저녁이 나에게는 슬픔이 가득 차 젖어버린 방 같았다. 내가 매일을 슬프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할 테지만, 꽤나 규칙적으로 건강하게 지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뜬금없이 울었다. 재미있는 것들을 보면서도 울 수 있었다. 운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눈에서 물이 넘쳐흘렀다는 말이 가장 정확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무시했다.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것. 부모님의 자랑이라는 것.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 마음을 무시하게 했다.
"난 이곳에서의 삶이 좋아. 난 행복해. 난 승무원이 천직이야."
이 말을 되풀이하며 말이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꿈을 놓아주는 법을 알게 되었다. 지구를 여러 바퀴 돌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지구 여러 점에서 만난 그들의 조언들이 나를 성장시켰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장기간 그리스 여행을 계획했지만 가족들이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 그럼, 나 혼자 가지 뭐."
그렇게 할아버지의 3개월간 그리스 여행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보니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그저 물을 바라만 보고 서있다고 바다를 건널 수 없다.]
- Rabindranath Tagore -
손에 넣은 지구가 멸망했다.
아니, 손에 넣은 '첫 번째' 지구가 멸망했을 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지구가 나에게 찾아왔다.
새로운 지구는 나의 손을 벗어나 가장 뜨거운 곳에 도착했다.
나의 마음. 그 마음이 두 번째 지구를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