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

2025. 08. 19

by conair

수안스님의 ‘인문학 힐링콘서트’를 다녀왔다. 친구의 페이스북 지인인 정영주 님이 자신이 운영하는 ‘여울아트홀’에 수안스님을 초청했다. 수안스님의 별칭은 ‘조계종 김광석’이다. 음색이 김광석과 너무나 흡사해 붙여진 별칭이다. 스님은 KBS 아침마당 ‘전국 스님 노래자랑’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때 부른 노래도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여울 아트홀은 많아야 4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공연장이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다. 지척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훌륭한 음향시설에 하모니카와 기타가 어우러진 스님의 공연은 때로는 ‘심쿵’ 때로는 ‘떼창의 흥분’이었다. 대형 공연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감동이었다.


1991년 어느 날 ‘예술마당 솔’에서 안치환 공연을 보았다. ‘예술마당 솔’은 ‘민족예술을 보듬는 대구 시민의 열린 공간’을 기치로 1990년 10월 문을 열었다. 허스키 보이스로 기타를 치며 ‘지리산 2’를 목놓아 부르던 안치환의 절절하고 걸걸한 목소리를 맨 앞 줄에서 넋 놓고 들었다. 당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만들고자 동분서주하던 시절이어서 그의 노래는 더 큰 울림이 되어 가슴에 와닿았다. 작은 공연장 안에 가득 울려 퍼지던 그의 노래와 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로 시작하는 ‘지리산 2’는 김지하의 시 ‘지리산’ 가운데 일부만 빌려와서 박종화가 노랫말을 썼다


지리산
김지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지척에서 공연을 관람할 기회는 흔하지 않다. 2014년 마지막 날 관람한 ‘비아트리오’의 공연은 너무나 특별했다. ‘비아트리오’는 해금,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으로 구성된 여성 4인조 퓨전 연주그룹이자 월드 뮤직 앙상블이다. 무대 위에 관람석을 마련한 파격적인 시도 덕분에 2M 앞에서 그녀들의 숨소리까지 들으며 슬픈 첼로와 해금, 경쾌한 바이올린, 얼음 속 찬 물결소리 같은 피아노의 협연을 온몸으로 감상했다. 우리의 가락과 서양의 가락이 완벽하게 조화되어 연주되는 70분은 황홀 그 자체였다. 네 명 모두 대단한 미인들이어서 귀뿐만 아니라 눈도 즐거운데 자꾸 박경리의 소설 ‘토지’ 속 네 미인 서희, 명희, 봉순, 양현이 떠 올랐다. 당시 박경리의 ‘토지’를 다시 읽으며 푹 빠져 있던 터였다.


수안스님이 안치환의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을 불렀다. 어느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는데, 안치환보다 잘 불렀다는 칭찬을 들으셨단다. 안치환이 구례 쪽에 공연을 갔을 때 구례에 사는 이원규 시인과 포장마차에 술을 먹으러 갔고, 그 술집 벽에 적힌 많은 시 중에 이원규의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시가 마음에 들어, 호형호제 하던 시인의 허락을 받아 작곡을 해서 탄생한 노래가 이 노래라고 한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 꽃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1992년 교직을 시작한 후 담임을 18년 했다. 그저 패기만 넘쳤던 첫 해를 제외하고 매년 학급문집이나 학급앨범을 제작했다. 학급문집은 매번 들어가는 시로 시작되었는데 1996년 2학년 4반 학급문집 ‘함께 웃자’의 들어가는 시는 이원규의 ‘겨울 외등’이었다.


겨울 외등

이원규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

저 아득한 별에서

이 시대의 가장 구체적인 외등까지

구호도 없이 눈발은 날리는데

또 어디쯤에서 눈물겨운 얘기를 끝내야 할까

도시 뒷골목길을 지나

늦게 귀가하는 갓서른의 겨울

밑동부터 마르는 수상한 시절의 코스모스와

소주 몇 잔에도 쉬이 비틀거리는 세상

세상은 온통 얼어서 빛나는 것들뿐이었다

아프게도 반짝이며 일어서는 서릿발과

억장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리는 서릿발 사이사이로

얼굴 없는 아니, 창백한 풀꽃들은 처참했다

안개와 어둠으로

세상이 더 많이 서러워질수록

밤새 관념투성이 정신들

깊이깊이 발목이 빠져 쓰러지는데

다시 한번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라

요소요소 척후병처럼 말없이 다가와

우리 절망의 심장을 속속들이 엿보고 있는

저 겨울 외등을

끝내 빛을 거부하지 못하고

잠 깨어 바라보는 누구에게나

어둠이 남겨놓은 저 겨울 외등의 성역을

언제나 절망의 다른 이름은

섣부른 희망이었다

너무 멀어 오히려 절망이 되는 별빛도 아닌

지상의 가장 구체적인 불빛을

뜨거운 이마 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라

한 시대의 쓸쓸한 밤을 지켜줄 것은

오직 저 겨울 외등뿐일지니

풀꽃 하나가 세상의 한 모서리를 감당하듯

저마다의 성역을 향하여

산 자는 산 값으로 치열하라!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값으로 치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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