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4. 20.
학생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교사가 학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상황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도 교사는 학생의 행동에 다른 반응을 보인다. 똑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학생에 따라 징계나 꾸중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평소 행동이 그의 어떤 행위에 대한 평가를 다르게 한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교사의 처분을 보면서 학생들은 교사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종종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사는 학생을 차별해야 합니다.” 담임을 맡으면 항상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한다. 대놓고 학생을 차별하겠다니, 뭐지 하는 반응을 보인다. “착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나의 도움이 없어도 학교에 적응을 잘할 것입니다. 교사가 필요한 학생은 공부 못하고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학생들입니다. 나는 이 학생들에게 더 관심을 가질 것이며 이 학생들을 더 많이 칭찬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이면 그제야 학생들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진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성적에 따라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선생님들이 꾸중을 할 때 ‘너는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 왜 그런 짓을 했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공부를 잘하면 도덕적으로 우수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실제로 교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학생은 공부는 잘하는데 이기적이거나 책임감이 없는 학생들이다. “똑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리에게 이로운 우유를 생산하지만 독사가 먹으면 사람을 죽이는 독을 만들게 됩니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학생들은 성장해서 ‘Opinion Leader’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학생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그 영향은 훨씬 광범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더 도덕적으로 훌륭해야 합니다.”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학생들에게 전한다.
많은 학교의 교훈은 크게 보면 지덕체(智德體)를 강조한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훈은 ‘밝게 알고 올바르게 행하자’인데 이도 지와 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보다 덕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덕이 없는 자는 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덕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체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지식인은 시대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불의와 부조리에 가차 없는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숙명이다. 그것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주선에 토끼 한 마리를 태우고 갔었는데, 이유는 기압에 따라 토끼의 눈이 충혈되는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끼의 눈이 기압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것처럼 지식인은 시대가 얼마나 정의로운지에 대한 바로미터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 역할을 못하면 세상은 더욱더 부조리한 곳으로, 정의와 공정이 사라지고 불법과 차별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으로 더 쉽게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할 진데 그러한 지식인이 불법과 차별에 부화뇌동하고 자신이 그러한 부조리를 조장하는 주범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학교에서는 철저하게 원칙을 가르쳐야 한다. 편법과 융통성은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면 너무나 쉽게 접하고 물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오늘도 학생들에게 원칙주의자이고 때로 고리타분한 꼰대다.
점심시간 급식실을 둘러보고 교정 뒤편으로 봄 햇살을 즐기러 나가는데 노란색 원복을 입은 유치원학생들이 짝꿍의 손을 잡고 긴 줄을 이루고 있다.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지나가지 못하고 한 참을 지켜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맞는 말임을 실감한다.
한 아이의 이름표를 보며 ‘너는 이름이 참 예쁘구나’ 했더니 옆의 아이가 슬그머니 뒤집혀 있는 이름표를 똑바로 해서 자신의 이름을 보이게 했다. ‘너도 이름이 예쁘구나.’
많은 경우에, 교육은 차별이 아니라 평등임을 각 중에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