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조직사이, 다시 배운 HR(#6)

#6. 폭풍 성장기, HR의 하루는 왜 늘 새벽이었나

by 사람과조직사이

폭발적인 성장기 조직에서 HR로 일해 본 사람들은
“번아웃”이라는 말이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되는 감각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야근, 철야, 주말 업무야 각오했더라도,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 처리한 일을 내일 또 다른 방식으로 처음부터 다시 겪게 되는 느낌.

그래서 퇴근은 늘 새벽이었고,
“내가 일을 못해서 이런가?”라는 자기 의심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이 글은
그 시기를 지나오면서 뒤늦게 붙잡게 된 하나의 통찰에 대한 기록이다.

성장기 HR의 번아웃은
개인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우선순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걸 떠안게 된 결과라는 것


1. J자 커브를 보이는 외형적 성장

당시 회사 인원은 이미 200명을 훌쩍 넘어 있었다.
채용 계획과 파이프라인을 보면 300인 기업으로 올라서는 것이 시간문제였다.


문제는,
조직은 300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제도와 구조는 여전히 30~50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인사제도가 없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설계하면 된다, 만들면 된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제도 이전의 문제부터 시끄러웠다.

근무시간 관리하지 않음

연봉 설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음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문서와 프로세스가 부재함


솔직히 말해,
그 시점에 근로감독이 들어왔으면
근무시간, 급여, 필수 문서 등 다양한 항목에서
지적을 받고 벌금을 내야 할 아찔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법적 요건 충족”을 목표로
차근차근 정리하면 되겠다 싶었다.


물론 그 자체로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진짜 힘들게 만든 건 '회사에서 HR을 바라보는 인식'이었다.



2. HR은 시키는 일만 처리하면 된다는 신화

(여전히 아직 많은 회사의 인식이겠지만) 그 회사의 HR은 이렇게 인식되고 있었다.

“일 많이 하는 사람들, 돈 많이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근로시간이 법적으로 문제 되면, 그거 수습하고 해결하는 건 HR이 하는 일이잖아요?”


HR을 “법적 리스크와 귀찮은 일 처리해주는 부서”쯤으로 보는 시선.


나는 HR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법적 테두리 안에서
사업 조직이 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역할.”


예를 들어,
특정 구성원이나 조직에서
근무시간이 유난히 과도하게 나타난다면,

비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인지

정말로 인력이 부족한 건지

구조적인 병목이 있는 건지

를 확인하고,
그 원인을 짚은 뒤 구조를 바꾸는 것이 HR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눈앞의 건(件)들을 처리하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오늘 해결한 문제”가
내일 또 다른 형태로 돌아올 뿐이라고 생각했다.


회사가 구성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장 구체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인사제도’이고,
그 설계를 돕는 것이 HR의 존재 이유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믿음과 회사의 인식 사이 간극이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3. 기준 없는 예외 처리, 그리고 HR의 새벽

기본적으로 나는

사안을 건건이 처리하기보다
큰 기준 안에서 처리하고, 진짜 예외일 때만 예외를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구성원들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줄 수 있고,
HR도 일을 할수록 구조가 잡히고 고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특정 리더의 목소리가 클수록 같은 이슈라도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동일한 문제임에도 “이 팀은 이렇게, 저 팀은 저렇게” 결론이 나곤 했다.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돌기 시작했다.

“어떤 룰이 중요한지가 아니라, 누구에게 잘 보이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HR에서 공지한 사항이더라도 본부장님께 건의하면 안 할 수도 있어요.”


HR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합의한 룰대로 처리해야 구조가 잡히고 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데,
매번 새롭게 예외를 만들다 보니 과거 사례를 참고할 수가 없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다고 느끼는 구성원들이 늘어났다.

고용부 진정, 소송, 각종 분쟁…
특정연도의 경우, 일년 내내 나의 업무는 노무 이슈 대응만으로 채워질 정도 였다.
(“나 올해는 회사에서 싸움만 한 것 같은데…”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구조와 우선순위를 먼저 정리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들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눈앞의 불을 끄기에 급급했고,
하루의 마무리는 늘 새벽이었다.




4. “설명해 주세요, HR은 무슨 일을 하는 건가요?”

이 와중에 나의 상사는 HR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로 인해
HR의 일을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 위주로 이해가 필요했다는 점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눈으로 볼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당시 구성원들도 비슷했다.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온 몸으로 표현하는) 시키는 일만 하겠다는 사람,

모든 걸 구구절절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


피플리더의 역할이
설명하고 설득하고,
필요하면 구성원이 못하는 일은 함께 해주는 것이라는 건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구조 없이, 기준 없이, 매일 새로운 예외로 쌓여 갈 때
그 부담은 단순히 “조금 힘들다” 수준을 넘어선다.

과거에 방치된 이슈들이 매일 새롭게 폭탄처럼 터져 나오고,

동시에 내년도에 꼭 만들어야 할 제도와 시스템은 뒤로 밀려나고,

그 사이에서 HR은 “지금도, 과거도, 미래도 다 책임져야 하는 부서”가 된다.


그렇게 “지금 당장 설명해야 하는 사람”,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사람”으로 살다 보니
하루는 늘 새벽에 끝났다.




5. HR의 번아웃은 개인의 능력 부족이 아니다

그 시기를 지나오면서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폭풍 성장기 HR의 번아웃은
개인의 역량이나 체력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우선순위를 정리하지 않은 채
모든 책임을 HR에게 몰아넣은 결과라는 것.


회사가 어떤 원칙으로 사람을 대할지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혹은 원칙과 실제 운영이 전혀 다른 상태에서,

어디까지는 용인하고 어디부터는 왜 안 된다고 말할지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먼저 고치고, 무엇은 나중에 볼지 우선순위를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HR에게만
“법도 지키고, 사람도 잡고, 성과도 내고,
리더도 설득하고, 구성원도 달래고,
경영진도 만족시켜 달라”고 요구하면

그 시스템에서 지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요즘 나는,
성장기 조직에서 HR이 느끼는 번아웃을
“개인적 문제”로 보기보다

“구조와 우선순위가 얼마나 명확하게 논의되고 합의되었는가”의 결과로 보는 것이
훨씬 현실에 가깝다고 느낀다.




6. 그래서 지금, 나는 ‘진단’이라는 도구를 붙잡고 있다

그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어디가 제일 아픈지,

무엇이 구조적 문제인지,

구성원들은 무엇을 가장 힘들어하는지,

리더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걸 말로만 풀어내려 하니
HR의 이야기는 늘 “주관적 의견”처럼 들렸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때의 새벽들을 떠올리며
다시 ‘진단’이라는 도구를 붙잡고 있다.


예를들면,

조직건강도 진단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판의 기울기를 확인하고,

조직진단을 통해
전략·구조·프로세스·문화의 어디에서 반복적인 이슈가 발생하는지 들여다보고,

직무만족도 진단을 통해
구성원들이 실제로 어떤 지점을 힘들어하는지,
무엇이 이들을 붙잡고 있는지 데이터를 남겨두는 것.

물론, 진단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를 정의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구조를 바꾸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공통의 언어와 지도는 되어준다고 믿는다.


지금 나는 GrowUP HR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진단 도구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때의 “새벽까지 울면서도 웃었던 팀”을 떠올리면서,


“다음 성장기 조직의 HR들은
같은 이유로 번아웃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마음을 조금씩 담아보고 있다.




7. 폭풍 성장기 HR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

이 글을 쓰면서
그 시절 함께 새벽을 버텨준 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힘들다고 울다가도,
말도 안 되는 이슈를 같이 욕하다가도,
결국엔 웃으면서 “그래도 우리 이만큼 만들었다”고 말해주던 사람들.


혹시 지금,
비슷한 자리에 있는 HR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부족해서 새벽인 게 아니다.
아직 구조와 우선순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많은 것을 혼자 떠안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언젠가,
당신이 조직 안에서 이런 질문을 꺼낼 수 있기를 응원한다.


“우리가 지금 겪는 문제의 구조는 무엇인가요?”

“어디부터 바꾸는 것이 이 조직에 가장 도움이 될까요?”

“그걸 함께 보기 위해, 한 번쯤 우리의 조직·문화·직무를 진단해볼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을 꺼내는 순간,
HR의 하루는 여전히 바쁘겠지만
적어도 “끝나지 않는 새벽”에서는
조금씩 멀어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람과 조직 사이에서,
그 질문을 먼저 던지는 HR들이
조금이라도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그 길 위에서 계속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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