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 잘하는 HR보다, 같이 일하고 싶은 HR이 되기까지
한동안 나는 “일 잘하는 HR”이 되는 게 목표였다.
제도를 잘 기획해서, 빠르게 보고하고, 문제없이 잘 운영하며,
리더를 설득할 논리와 데이터도 준비된 조직.
그런데 인하우스에서 팀장 역할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목표 문장이 이렇게 바뀌는 걸 느꼈다.
“일 잘하는 HR”보다
“같이 일하고 싶은 HR”이 되는 것.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극이 있다는 걸
몸으로 배우게 되었다.
내가 있었던 HR본부는 세 가지 기능으로 구성된 팀으로 나뉘어 있었다.
인사기획 및 인사운영
조직문화 & 교육
총무
나는 그 중 인사기획 및 인사운영 팀장을 맡고 있었고,
나의 상사는 언젠가 내가 조직문화&교육팀까지 아우르며
'경계 없이 일하는 HR 리더'가 되길 바랐다.
말만 들으면 멋있다.
'벽을 허물고, 함께 일하자.'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전제가 깔려 있었다.
“컬처팀 담당자들도 피플팀의 업무를
직접 경험해볼 수 있게 해달라.”
문제는,
그게 현실적인 요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업무에 필요한 정보 공유는 '보안'을 이유로 막히고,
제도 설계와 구성원 관리에 HR본부 스스로도 배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경계 없이 일한다'는 말과 실제 구조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경계 없이 일하자”는 말은
멋진 슬로건이 될 수 있지만,
전제조건이 없다면
그저 피로감을 부르는 주문이 되기 쉽다.
정말 솔직히 말해,
당시 팀원들의 상태를 보면
“경계 없이 일합시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A 담당자
본인이 맡은 영역의 기본 이론조차 잘 모르는 상태.
“공부하고 싶다”는 말은 했지만, 학습에 대한 태도와 실행이 잘 따라오지 않았다.
B 담당자
기존 방식만 고수했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원래 하던 대로'를 안전장치처럼 붙들고 있었다.
이 팀원들을 성장시키면서
눈앞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다른 팀 구성원들까지 “경험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너무 버거운 미션이었다.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마음은 그랬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식은
“모두가 다 잘하자”가 아니라
“각자의 역할과 경계를 더 명확히 하고, 기대수준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나의 욕심때문에 기대수준이 과도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각 구성원에게 맡은 영역에 대한 전담 책임을 부여하고
'요청받은 업무를 지장 없이 처리하는 것'을 1차 목표로 두고
그 위에 여유가 생기면 다른 팀을 돕는 구조를 올렸다
이렇게 하면
팀원 스스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맡은 영역의 제도를 기획하고 운영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지?”
“어떤 도움을, 누구에게, 어떻게 요청해야 할까?”
그 과정 자체가
성장과 관계를 동시에 만들어주는 장치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당해 연말,
(정말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나왔다.
“팀장님,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한 번 적용해봐도 될까요?”
예전에라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던” 팀원이
스스로 방법을 제안하는 순간이었다.
그 말을 듣는데,
진짜 눈물이 날 뻔했다.
아니, 진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아, 역할·경계·기대를
처음부터 다시 짠 게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HR본부 밖에서는
또 다른 얼굴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티컬한 조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우리는 “사건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했다.
그 때 내가 가장 신경 쓴 건
사실관계 파악과 동시에
사람을 탓하지 않는 프레임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 한 명이 이상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라,
회사가 그동안 보내온 메시지, 구조, 우선순위가
이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이슈 해결 과정에서 실패와 실수들을 겪으며, 이런 순서로 반드시 움직이게 되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사실들을 어떤 프레임으로 모을지 먼저 정리하고,
왜 귀하의 도움이 꼭 필요한지 설명하고 부탁하며,
대응 과정에서 각자의 개인사와 맥락도 조금씩 듣고(필요하다면 나의 개인사도 풀어놓고),
“회사 vs 개인”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문제 vs 우리가 원하는 방향”의 구도로 바꾸려고 했다.
그렇게 몇 번의 큰 이슈를 함께 넘기고 나니,
입사 2년 차 쯤부터는
리더들이 먼저 연락을 주기 시작했다.
“이건 나중에 커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상의드리려고요.”
“우리 팀에 이런 상황이 있는데,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까요?”
그 전에는
“문제 터지면 HR에 넘기면 된다”는 인식에 가깝다면,
조금씩
“HR과 미리 상의하는 게 좋다”는
경험이
쌓여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의 HR 팀장 역할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혼자 많이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역할·경계를 설계해서
팀과 조직이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사람.”
팀 안에서는
각자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현실적인 경계를 세워 주는 사람.
팀 밖에서는
사람을 바로 탓하기보다 구조와 메시지의 문제를 먼저 짚어보자고 제안하는 사람.
이런 HR을 경험한 구성원들은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해줬다.
“HR이 있어 다행이다.”
“적어도 이 얘기는 HR이랑 먼저 나눠보자.”
그 말이 단지
“일을 잘 처리해줘서” 나오는 말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 경험들을 지나고 나니
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리더 역할에 몰입하고 있는가? (문제 해결자? 방파제? 구조 설계자?)
나의 리더십 스타일은 팀에게 어떤 경험으로 다가가고 있을까?
나는 아직 실무 전문가(Individual Contributor)의 관성으로 팀장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요즘은
리더 역할 몰입 및 성장지수, 리더십 유형,
리더-실무전문가 경향성을 보는 진단들을
다시 흥미롭게 들여다보고 있다.
예전에는
“고객에게 제안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지금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 잘하는 HR을 넘어서
같이 일하고 싶은 HR이 되려면,
결국 나부터
“어떤 HR리더로 성장하고 싶은지”를
계속 진단하고, 점검해야 한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오늘도 사람과 조직 사이에서,
자기의 역할을 만들어가고 있는 모든분께
멀리서 응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