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해달라는 일 처리 부서에서, 문제를 정의하는 HR로
"오늘 나는 무엇을 '정의'했을까?"
HR Operation(인사운영)을 주로 담당하는 인사담당자들의 경우, 출근해서 메일함이나 업무소통창을 열면 하루의 흐름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지는 것 같다.
"채용을 좀 진행하고 싶은데 절차가 어떻게 되나요"
"이번 달 급여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설명부탁드려요."
"성과급 지급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이번 인사발령 공지 문구 검토 부탁드립니다."
등 (확인)요청은 대부분 "이미 정해진 일"에 대한 처리다.
하루가 끝날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 해달라는 일을 잘 처리해준 것 말고
무엇을 '정의'하고, 무엇을 '바꾸자'고 말했을까?"
많은 조직에서 HR은 여전히 "해달라는 일 처리 부서"로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컨설턴트로, 또 인하우스 피플리더로 일하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된 한 가지가 있다.
HR은 '해달라는 일 처리 부서'가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성장의 방향을 짚는 역할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HR을 '주문 처리 창구'처럼 쓰는 조직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요청은 늘 구체적인데, 문제는 늘 추상적이다.
"직급체계 개편이 필요해요. 우리조직에 안맞는 것 같아요"
"성과관리 제도 손봐야 될 것 같아요."
"올해는 조직문화 프로그램 좀 해야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왜 이걸 하려는지, 무엇이 "현재 문제"인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따라오지 않는다.
둘째,
HR에게 들어오는 일의 시작점이 이미 '솔루션'인 경우가 많다.
"이런 제도 좀 만들어 주세요."
"이 회사처럼 평가제도 바꿔 봅시다."
이 단계에서 HR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요청받은 기능을 얼마나 깔끔하게 구현해 주느냐" 정도에 머물게 된다.
셋째,
HR 스스로도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하게 된다.
"현업이 원하는 게 그거라는데, 어쩌겠어요."
"경영진 지시라서요. 일단 만들어 봐야죠."
이렇게 HR은 업무 범위는 넓고 바쁜데, 정작 '조직의 문제를 정의하는 자리'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인하우스에서 많은 리더분들과 함께하며 배운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는,
"받아 적는 질문"에서 "되묻는 질문"으로 옮겨가는 일이었다.
요청이 들어올 때, HR의 질문은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대상자는 누구인가요?"
"작년에 썼던 양식 보내주실 수 있나요?"
물론 필요한 질문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단계만 더 들어가면, HR의 역할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이다.
"이걸 하려고 하시는 핵심 이유가 무엇인가요?"
"지금 이 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계실까요?"
"이번에 가장 달라졌으면 하는 지표나 행동은 무엇인가요?"
"이게 잘 되면, 내년 이 시점에 무엇이 '좋아졌다'고 말하고 싶으세요?"
처음엔 현업조직이나 경영진이
"그냥 좀 해주세요, 디테일은 HR에서 알아서 해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할 수도 있다.
(TMI: 특정 리더는 협의를 마쳐놓고서는 대표님까지 모셔와서 해당 조직에서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는 지시를 받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질문을 꾸준히, 예의 있게, 집요하게 반복하면 조금씩 변하는 것이 있다.
요청이 "제도 이름"에서 → "문제 설명"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이거 좀 만들어주세요"에서 → "지금 우리 상황이 이렇습니다"로 바뀌고
"HR이 알아서"에서 → "함께 정의해 봅시다"로 바뀐다.
결국 HR은,
들어오는 일을 잘게 쪼개어 처리하는 역할에서 조직의 문제를 함께 정의하고,
방향을 제안하는 역할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문제를 정의하는 HR"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다르게 할까?
현업과 일하면서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방식은 크게 세 가지였다.
① 요청을 바로 '업무'로 넘기지 않고, 잠깐 '메모'로 붙잡아 놓기
요청을 들으면 바로 To-do 리스트에 넣기 전에, 짧게라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지금 요청의 표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요청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두려움/불편/기대는 무엇인가?
이 과제가 성공하면, 조직의 어디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이걸 나는 마음속으로 '문제 정의 메모'라고 불렀다.
이 메모가 쌓이면, 어느 순간 이런 것들이 보인다.
"이 회사는 채용·온보딩보다, 리더십과 평가 쪽이 더 시급하구나."
"이 조직의 진짜 문제는 제도 부족이 아니라, 이미 있는 룰을 지키지 않는 문화구나."
"현업은 늘 보상을 얘기하지만, 알고 보니 역할 정의와 기대수준이 먼저 정리되어야 하는 상황이구나."
② 모든 요청을 다 '프로젝트'로 만들지 않기
문제 정의를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을 거대한 프로젝트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번에는 그냥 처리" 해야 할 것과
"이번에는 기준을 바꾸자고 제안"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
그게 HR의 중요한 역할이더라.
예를 들어, 올해는 이미 평가 시즌이 촉박해서 구조를 못 바꾼다면, "이번 해는 최소한 기준과 프로세스, 감수해야 하는 사항들을 기록하고 합의해 두되, 내년에는 반드시 구조부터 손보자고 제안하는 것"
이런 식으로 '언제,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지에 대한 HR의 판단이 문제 정의의 일부가 된다고 느꼈다.
③ 데이터와 진단을 '대화의 시작점'으로 쓰는 것
문제를 정의할 때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는, "각자 보고 있는 현실이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리더는 "우리 팀은 문제 없다"고 말하고
어떤 구성원은 "이제는 말해도 어차피 안 바뀐다"고 말하며
경영진은 "성과는 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할 때,
감정과 주장만 오가는 회의에서 HR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제한적이다.
그래서 나는 점점 '진단과 데이터'가 '문제를 정의하는 가장 단순한 도구'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벽은,
"증거나 근거가 있나요?"라는 질문에
"경험상 그래요" 혹은 "몇몇 케이스를 봤는데요" 정도로만 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예를들면,
조직건강도 진단으로 "우리 조직이 지금 어디에 힘이 빠져 있는지"를 보여주고
직무만족도 진단으로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에 만족/불만족을 느끼는지"를 꺼내고
리더십/팀 효과성 진단으로 "어떤 팀에서 어떤 패턴의 이슈가 반복되는지"를 확인하면
대화는 조금 더 "누구 탓"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로 옮겨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HR은 이 지점에서,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문제를 함께 정의하는 파트너"가 된다.
④ '문제를 정의하는 HR'은 결국, 조직의 성장성과를 만든다
HR이 문제를 정의한다고 해서 모든 해답을 HR이 혼자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HR은 "이게 문제입니다" 혹은 "이런 문제가 반드시 발생합니다" 라고
가장 먼저 말해 줄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누구도 문제라고 말하지 못해 묻혀 있는 이슈를
"이건 구조의 문제입니다", "이건 리더십과 제도의 엮임입니다"라고 언어로 꺼내 주는 것
그리고 "이걸 안 바꾸면 1년 뒤, 3년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조금 더 길게 상상해 보는 것
이건 HR이 아니면 누가 해 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⑤ 사람과 조직사이, HR에게 필요한 작은 전환
현실에서 HR은 여전히 바쁘다.
메일함은 늘 가득 차 있고, 각 시즌마다 "해달라는 일"이 폭발한다.
그렇기에 "오늘부터 모든 걸 문제 정의 모드로 전환하자"는 말은 나도 차마 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는 제안해보고 싶다.
문제를 정의하는 HR로의 전환,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요청을 To-do로 옮기기 전에 10초만이라도 "이게 해결하려는 문제는 뭐지?"라고 메모해 두기
"언제까지 필요하세요?"라는 질문 뒤에
"이걸 왜 하려는 건지 맥락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라는 질문 덧붙이기
"이번에는 일단 해드릴게요" 다음에
"대신 다음엔 문제부터 같이 짚고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해 보기
작은 질문 하나, 짧은 메모 한 줄에서부터 HR의 역할은 조금씩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여전히 지금도, 오늘도 사람과 조직 사이에서 "문제를 정의하는 HR"로 역할을 하기 위해
계속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회사에 왜 HR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해달라는 일만 처리하는 조직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성장의 방향을 짚어주는 조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