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의 로맨스(2)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 손해영은 손해 보기 싫어서 가짜 결혼을 한다.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각종 정책 속에서 소외되고 때론 손해를 보는 비혼/여성으로서 그 손해를 상쇄하고 출세가도를 달리기 위한 방편으로 동네 편의점 알바생과 가짜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 밖에 그 알바생과 인연이 반복되고 알바생의 매력에 매료되면서 (가짜) 결혼 후 (가짜) 남편과 썸을 타고 연애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 (가짜) 결혼은 두 사람에게 로맨스의 매개이자 계기, 시발점으로 기능한다.
연애 후 결혼, 결혼으로 귀결되는 연애 서사가 근대적 로맨스의 전형이라면, 최근에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 <손해 보기 싫어서>와 같이 근대 로맨스의 전형적 구조를 전복하여 계약/가짜 결혼을 하고 나서 비로소 남녀 관계가 시작되고 로맨스가 전개되는, ‘혼후 연애’ 구도의 로맨스도 심심찮게 보인다.
사회역사적 상황이 오늘날과 매우 다르지만 ‘혼후 연애’라는 구도는 고전소설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 상층에서 활발히 향유했던 한글장편소설에서 남녀의 만남은 혼인에서 비롯된다. 상층의 혼속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혼인 자체가 남녀의 만남을 의미하고 거기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결연 방식에 관계없이 혼전 연애라는 것이 부재하는 것이다.
18세기 향유된 <명주기봉>(18권 18책)에는 여러 커플이 등장한다. 그들이 펼치는 다채로운 부부/연애 서사는, 대부분 당사자가 아닌 주혼자나 중매자에 의해 짝이 지어진 혼사가 진행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스스로 배우자를 구하거나, 누군가 우연히 짝사랑에 빠졌을 경우에도 혼전에 당사자 간 관계가 발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기보다 우선 그 상대와 혼인하려 든다. 부모의 허락 없이 사사로이 연을 맺는 일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도리어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조부나 친척 어른에게 중매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며 혼사를 먼저 진행한다. 그것이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방도였다. 남녀의 사통(私通)이 금기시된 상층의 문화에서 남녀가 서로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키우는 혼전의 연애 과정은 존재하기 힘들었고, 혼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녀가 혼인을 했다고 해서 단번에 서로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질 리는 없다. 혼례 때 처음 마주한 남녀는 그때부터 서로에 대해 탐색하게 되는데, 성격이 안 맞기도 하고,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며, 남성인물이 이미 다른 이에게 마음을 둔 상태라 애초에 아내에게 아무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경우에 따라 오랜 시간 갈등이 전개되기도 하는데, 혼인을 반대했던 부모의 방해, 다른 이성의 개입, 혹은 서로에 대한 오해, 성격 차이 등 다양한 내외적 시련이 등장하면서 부부간의 화합이 지연된다. 갈등이 간단하게 해결되어 남녀가 금세 화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인공 커플은 몇 년에 걸친 지난한 갈등 끝에 비로소 오해를 풀고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명주기봉>의 사랑 서사는 ‘불화’에서 ‘화합’으로 나아가는 구조를 취하는, 요샛말로 ‘혐관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녀인물은 그들만의 연애를 진행한다. 한글장편소설에서 남녀 중심인물이 혼인 후 첫날밤 동침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린 나이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많기에 부모의 명에 의해 동침이 지연되기도 하지만, 당사자 간 상대에 대한 무관심과 적대감, 낯선 상대에 대한 탐색 의도 등에 의해 혼인 첫날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낯선 상태에서 오해하고 갈등하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가벼운 스킨십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기까지, 낯선 상태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며 호감이 생기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등 관계가 서서히 진행된다.
그런데 한글장편소설에서 전개되는 혼후의 연애는, 조선 상층의 혼속, 축첩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일부다처의 관계 안에서 진행된다. 한 남성이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이런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무슨 사랑을 하겠냐 싶지만, 그러한 현실에서도 사랑에 대한 염원은 존재했다. 축첩제는 인정되며 당연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남성인물은 여러 여성과 결연을 하는 중에도 대개는 한 명의 여성과 진정하고도 절절한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성인물(남편의 또 다른 처와 첩)은 작품 문면에 자세히 드러나지 않거나, 다른 처‧첩과의 관계는 충동적이고 곧 변질되는 것, 이후에 다가올 진정한 사랑을 부각할 무엇이 된다. 외형적으로는 일대다의 형태를 띠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대일 관계의 사랑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처럼 일대일 관계에 강조점이 놓여 그것이 집중적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일부다처의 환경에 있으면서도 독점적 애정 관계를 희구하는 여성의 욕망과 관련된다. 조선시대 일대다 관계의 사랑이 그려진 소설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구운몽>일 것이다. <구운몽>은 양소유가 여덟 명의 여성과 연애하는 이야기가 편력구조로 전개돼 있어, 유교적 예교의 속박을 벗고 남성의 욕망을 한껏 펼친 소설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일대다의 관계는 평화롭고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양소유는 인연을 맺는 여성 한 명 한 명과 매 순간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겁게 연애한다. 양소유의 사랑은 각각의 관계에서 진정성을 띤 것으로 모든 상대의 마음을 만족시키며, 여성들은 양소유와도, 그리고 여성들 간에도 아무런 갈등 없이 오로지 화락한다.
그런데 <구운몽>에 한껏 펼쳐진 욕망은 남성의 욕망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덟 명의 여성이 모두 한 명의 남성을 사랑하는데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혹은 여성 향유자 입장에서 이러한 관계를 이상적이라 여기며 간절히 꿈꾸겠는가? 양소유를 둘러싼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양소유의 욕망을 욕망하는, 철저히 남성적 환상에서 탄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양소유와 여덟 여성의 관계는 철저히 남성적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서사에는 일부다처제 하의 여성 현실과 욕망이 아예 소거되어 있다.
반면 한글장편소설에는 일대다의 관계에서 배태될 수 있는 온갖 갈등, 일부다처의 현실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들이 때론 핍진하게 때론 과장되게 다채로이 그려져 있다. 그런 가운데 남성과 결연하는 다수의 여성인물 가운데 한 명의 인물이, 온갖 갈등 속에서도 화락의 관계로 나아가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는 주인공이 된다. 여성 독자들은 바로 이 한 명의 여성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일대다의 관계에서나마 온전한 사랑을 염원했으리라.
그렇다면 그 한 명의 여성, 한글장편소설 여성 주인공의 로맨스는 어떻게 펼쳐질까?
다음 편에 이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