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 박지원의 <회우록서>를 읽으며
박지원과 홍대용의 우정은 유명하다. 그들은 정서적, 사상적으로 서로 깊이 이해하는 벗이었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상적 저변을 넓혀갔다. 홍대용과 박지원이 ‘북학파’(조선 후기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의 현실 개혁을 추구한 사상적 유파)의 대표적 문인이란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이 공유한 사상 가운데 ‘북학’을 빼놓을 수 없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우리에게 꽤 익숙하다.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에는 북학에 대한 박지원의 사유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조선에는 이미 청나라 여행기를 쓰는 전통이 있었다. 그것을 ‘연행록’이라 하는데 사신이나 수행원으로 중국을 다녀와 보고 느낀 것을 쓴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홍대용은 박지원보다 먼저 청나라에 다녀온 뒤 『연기』를 썼고 이는 『열하일기』 집필에도 영향을 끼쳤다.
홍대용은 1765년 작은아버지 수행원으로 중국 여행길에 올라 그곳에서 엄성, 반정균, 육비 세 명의 중국 선비와 만나 깊이 있는 교류를 한다. 그들과 주고받았던 필담, 시문, 편지들을 정리해 『회우록』(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는 책을 엮고 박지원에게 그 책의 서문을 부탁한다.
우리나라 서른여섯 도회지에 노닐다 동쪽으로 가 동해를 굽어보면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가없는데 이름난 산과 높다란 봉우리가 그 사이에 솟아 있어 백 리 이어진 들이 드물고 천 호 되는 고을이 없으니, 그 땅덩어리가 참으로 좁다 하겠다.
옛날에 이른바 양자, 묵자, 노자, 부처와 같은 유도 아니건만 네 가지 의론이(노론, 소론, 남인, 소북 네 가지 당파) 존재하고, 옛날의 이른바 사, 농, 공, 상도 아니건만 네 가지 신분이(문반, 무반, 서얼, 중인) 존재한다. 단지 그 숭상하는 바가 같지 않아서일 뿐이건만 서로 헐뜯는 의론을 펼쳐 북쪽 진나라와 남쪽 월나라가 먼 것보다 더 소원하고, 그 처한 바가 달라서일 뿐이건만 신분에 차등을 둠이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다.
그리하여 그 의론이 다름을 꺼려, 이름은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친구 하지는 아니하고, 지체가 다름에 구애되어, 서로 접촉은 하면서도 감히 벗 삼으려고는 않는다. 그 사는 마을이 같고 종족이 같으며 언어와 의관이 나와 저 사이에 별로 다른 것이 없건만 서로 친구 하지 않으니 서로 혼인인들 하겠는가? 서로 벗을 삼지 않으니 더불어 도를 꾀할 수 있겠는가? 이 네 가지 의론과 네 가지 신분이 아득히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을 진나라와 월나라, 중화와 오랑캐의 관계처럼 만들었으나 지붕을 맞대고 담장을 나란히 한 채 생활하고 있다. 그 습속이 어찌 이리 편협한가?
박지원, <회우록서>(박희병,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에 써 준 서문」,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2006, 131~132면. 일부 수정. 이하 동일.)
박지원의 서문은 『회우록』이나 저자에 대한 언급 없이 조선 땅이 좁다느니 조선 사람들이 당파와 지체에 얽매어 교류가 편협하다느니 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조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 이후에야 “홍군 덕보는 일찍이 한 필 말을 타고 사행을 따라 중국에 간 적이 있다”며 비로소 홍대용의 중국행과 그곳 선비들과의 교류에 대해 서술한다.
홍대용이 중국 선비들이 묵는 여관으로 찾아가 학문, 사상, 역사, 문학, 예술 등 온갖 주제에 대해 열띠게 토론한 일을 말한 뒤 “이에 처음에는 서로 지기로 허여하다가 종국에는 의형제를 맺었다.”며 국적과 민족, 언어와 문화가 다른 그들이 깊이 있게 교류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는 그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서로 친구 하지 않더니 지금 만 리나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교우하고 있고,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같은 종족이면서도 서로 사귀지 않더니 지금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을 벗 삼고 있으며, 접때 자기 나라에 살 땐 언어와 의관이 같아도 서로 벗 삼지 않더니 지금 갑자기 서로 말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른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니 어떻게 된 일일까?”라며, 홍대용 역시 조선에서는 사색당파와 신분질서에 따라 벗 사귐이 편협하더니, 그보다 더 많은 차이가 있는 중국인들과는 어떻게 우정을 나누었냐는 것이다.
그러자 홍대용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홍군은 서글픈 표정으로 이윽히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어 벗을 사귈 수 없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실로 지경에 국한되고 습속에 구애되어 답답한 마음이 없지 않았사외다. (…) 그렇다고 한다면 저들 세 선비가 나를 볼 때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라든가 의론이나 지체가 다른 데 대한 거리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번거로운 법도를 깨뜨리고 자잘한 예절도 치워 버리고는 진정을 드러내고 간담을 토로했으니 그 크고 너른 마음은 쩨쩨하게 명예나 권세나 이익의 길에서 아득바득하는 치들과 어찌 같다고 하겠습니까?”
박지원, <회우록서>
홍대용은 조선에서의 인간관계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으면서 스스로도 그 습속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음과, 중국에서는 그런 구속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인격적,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쩨쩨하게 명예나 권세나 이익의 길에서 아득바득하는 치들과” 다른 만남이었음을 말한다.
앞서 박지원은 조선의 교우 관계의 편협함을 지적하며 조선의 습속이 사색당파와 신분질서에 구애됨을 말한 바 있다.(“단지 그 숭상하는 바가 같지 않아서일 뿐이건만 서로 헐뜯는 의론을 펼쳐 북쪽 진나라와 남쪽 월나라가 먼 것보다 더 소원하고, 그 처한 바가 달라서일 뿐이건만 신분에 차등을 둠이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다.”) 조선의 교우 관계가 편협하게 된 것은 홍대용의 말처럼 그것이 명예나 권세, 이익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대용은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도 중국 벗들과 서간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나간다. 이 사건은 한중 교류사에도 기념비적인 일로 회자된다.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의 사색당파나 신분질서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관계가 그런 것에 구애됨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이, 성별, 지역, 학벌, 직업, 인종, 국적 등을 차등화하며 서로 배제하고 차별하며 혐오하는 분위기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더욱이 세계시민이 요구되는 시대에 도리어 국가와 인종 간 장벽이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지식수준은 조선시대에 비해 눈부실 정도로 발전했음에도 지식 탐구의 목적 가운데 하나일, 타자와 타자의 삶에 대한 섬세한 인식과 깊이 있는 이해는 여전히 요원하게 여겨진다.
홍대용은 귀국 후, 재야 선비로 명망이 높던 김종후로부터 더러운 원수의 나라에서 변발한 이들과 형제처럼 사귀었다고 비난을 받는다. 이에 홍대용은 당당한 태도로 그 비난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기 쉽다. 역사를 배운 우리는 홍대용과 김종후 가운데 누구의 생각과 태도가 바람직한지 안다. 그런데 지금의 일에 대해서는 섬세하게 인식하고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우리 민족이 타국에서 받아온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가 국내에서 타국, 타민족을 향해 커지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서글픈 마음이 들어 홍대용의 벗 사귐을 떠올려 본다.
*참고자료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2006
커버이미지 : <홍대용필 간찰>,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MUSEUM/contents/M0502000000.do?schM=view&searchId=search&relicId=80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