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은 천편일률적으로 ‘권선징악’(선을 권장하고 악은 징계한다)이나 ‘복선화음’(착한 이에게는 복이, 악한 이에게는 재앙이 돌아간다)의 주제를 담고 있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배우는 소설들은 대개 선악의 대결이 뚜렷하고 선인이 악인을 이겨 해피엔딩의 결론에 도달하는 작품들이 많으니, 학교 밖에서 고전소설을 읽을 일이 만무할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고전소설=권선징악’의 공식이 각인될 법도 하다.
그런데 고전소설의 초창기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전기소설들은 선악 대결 구도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15세기 소설로, 여전히 중고등학교에서는 고전소설 초기작으로 가르치는 김시습의 소설들은 비극적 정조나, 현실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드러나 있고, 그 뒤를 잇는 <운영전>, <주생전>과 같은 전기소설들 역시 그러하다. 선악의 대결 구도나 권선징악의 교훈이 뚜렷해지는 작품의 출현은 보다 후대의 현상이다.
아무튼 고전소설이 모두 선악 대결 구도의 권선징악 이야기가 아니라는 논의는 차치하고서, 오늘은 그 권선징악이나 복선화음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F1 더 무비>를 봤다. 나로서는 가장 최근에 본 영화이기도 하고(본 지도 이미 꽤 시간이 흘렀지만) 오랜만에 재미있게 본 대중영화이기도 했다.
<F1 더 무비>는 포뮬러 1(F1)을 소재로 한 영화로, 60대인 브래드 피트가 현역 레이서로 등장해 여전히 멋짐을 뿜뿜 발산한다. 실감 나는 카레이싱의 스릴에 어느 순간 몰입하다 보면 헐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봤던 뻔한 서사 공식은(아픔을 겪은 주인공이 그것을 이겨내고 승리한다는 해피엔딩의) 재미를 감소시키기는커녕, 그 뻔한 결말대로 끝맺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한때 F1의 슈퍼루키로 각광받던 소니 헤이스(브래트 피트 분)가 레이싱 중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상처 입은 몸과 마음으로 한참을 방황하다가 오랜 동료의 권유로 F1에 복귀해 최하위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 위해 분투한다는 이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 소니의 화려한 승리, 뻔한 해피엔딩(권선징악의 의미가 내포된)으로 마무리되길 간절히 소망하게 한다. 그것은 비단 소니 역을 맡은 브래트 피트가 여전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미덕을 지닌 주인공이 독자들이 미워할 만한 악덕을 지닌 상대를 이기고 행복한 결말을 일궈내는 이야기는 고전과 현대를 막론하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고전소설의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나 선이 승리한다는 해피엔딩의 구도가 고루하고 지루하다 여겨지지만 여전히 그 명맥은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중적 콘텐츠들 역시 대개는 권선징악이 내포된 해피엔딩의 구도를 따르고 대중은 그 공식을 여전히 사랑하므로 대중 콘텐츠의 창작자들은 그것을 배반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 오늘날의 작품들도 천편일률적인 뻔한 이야기라 곧잘 비판받지만, 흥행의 차원에서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힘은 여전하다.
그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고전소설이 받아온 편견과 비난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우리가 뻔한 전개가 예상됨에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는 것과 같이, 당대인들에겐 고전소설이 그와 비슷한 즐거움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들의 감각과 우리의 감각 사이 괴리가 큰 탓에 그들의 즐거움이 잘 와닿지 않다 하더라도 과거의 것을 싸잡아 폄하해서는 안될 터이다.
루카치의 지적대로 소설이란 ‘어느 장르보다도 윤리가 미학적인 것이 되는 장르’로, 권선징악이라는 윤리적 주제 자체도 문제라 할 수 없을 것이다.(서인석) 물론 윤리적 주제를 너무 얄팍하고 뻔하게 다루는 유형의 소설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고, 그것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재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 있지만, 뻔한 것들 가운데 우리에겐 낯선 과거의 공통감각과 보편적 의식을 포착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의식과 감각을 낯설게 여기며 성찰해 보거나, 반복되는 것 중에 변주되는 지점에 집중해 작품마다의 고유한 개성과 재미를 찾아보는 편이 더 유의미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보통의 대중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작업을 하여 대중에게 고전소설의 재미와 의미를 알려야 하는 나와 같은 연구자들의 몫이다. 사실은, <F1 더 무비>를 너무 재밌게 보고 와서, 다시 비슷한 유의 고전소설을 반복해서 읽다 다소 지쳐버린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이다.
*참고자료
커버 이미지: 영화 <F1 더 무비> 공식 포스터
서인석, 「고전산문 연구와 국어교육」, 『고전소설 교육의 과제와 방향』, 월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