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란호연록> 주인공 ‘한난희’의 경우
수동 공격적 행동(passive-aggressive behavior)이란 것이 있다.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불만이나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상대를 직접 공격하기보다 간접적 방식, 예를 들어 상대의 요청을 미루거나 질문에 침묵하고, 상대를 피하고, 불쾌한 기색에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등 겉보기에는 무해하거나 우연적이며 중립적인 것을 가장해, 선명히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행동 패턴이다.
이런 식의 행동 양식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감정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소통을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한다. 수동 공격적 행동을 하는 당사자 역시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은 제대로 다뤄질 기회를 얻지 못한다. 표현되지 않은 불평한 감정은 해소되기도 어려워서 관계를 더욱 어렵게 한다.
오늘날 수동 공격적 행동은 문제적인 대인관계 패턴으로 인식되면서 심리치료 대상으로 다뤄지곤 한다. 이런 행동 패턴을 지속하는 경우 당사자의 대인 관계가 악화되고, 그런 인물들이 소속된 조직 내에서는 비효율적이고 피로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지속됨으로써 업무가 지연되거나 팀워크가 훼손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18세기 소설 <창란호연록>에도 수동 공격적 행동을 반복하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난희는 남편 장희와 오랜 기간 지난한 갈등을 하며 수동 공격적 행동을 보인다.
한난희와 장희는 어릴 적 정혼한 사이로 혼인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두 사람의 부친은 죽마고우로 각자 딸과 아들을 낳자 혼약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혼기가 찰 무렵 장희의 부친(장두)이 정적의 모함에 실각하게 되고 한난희 부친(한제)은 출세를 위해 장두를 모함한 상대편에 아부하며 친구 장두를 배신한다. 이 일로 장두는 유배당하고 그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될 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협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장희는 한제를 원수로 여기고 한난희와의 혼인도 원치 않게 된다.
한편 한난희는 부친 한제가 장희 가문의 몰락에 어떻게 간여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부친이 자신을 다른 가문에 시집보내려 하자 정혼자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다른 가문과의 혼인은 강행되고 이에 한난희는 가출해 온갖 고생을 하다 죽을 고비까지 겪는다. 다행히 장두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결국 장희와 혼인하기에 이른다.
한난희와 장희는 정혼한 사이였지만 막상 혼례할 때는 둘 다 이 혼인에 회의적이었다. 장희 입장에서는 원수의 딸과 혼인해야 하는 상황이, 한난희 입장에서는 장희가 자신의 가문을 원수로 여기며 혼인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한난희는 장희에게 농락당해 자결한 전사도 있었다.
그 전사란 이렇다. 장희는 가문이 몰락하자 여러 위험을 피해 여장한 채 유랑하다가 한제의 집에 여종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희는 한난희의 여종이 되어 그녀의 일상을 엿보고, 정혼을 깨기 위해 그녀를 다른 가문에 시집보내려는 한제의 계획에 동조하게 된다. 그러다 여장남자란 사실을 들켜 도망치게 되는데, 이때 가출한 한난희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고, 남자이면서 여종인 척 자신을 농락한 일에 분노하는 한난희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성추행을 해, 절개를 목숨같이 여기던 한난희로 하여금 강에 투신하게 한다.
한난희는 이 모든 상황에서 장희가 자신의 정혼자란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장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그와 함께 지내다가 이후 부친을 찾아온 장희를 만나고서야, 자신을 자결하게 만든 그가 자결로써 투철하게 지켰던 절개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정혼자와 혼인하게 되었으니 겉으로 보기엔 수절한 보람이 있다 하겠지만, 한난희의 내면을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인 장두는 죽마고우인 한제를 이해하고 며느리인 한난희의 절개를 높이 사며 따뜻하게 포용하면서 혼사를 주선했지만, 장희는 한난희에게 신뢰할 수 없는 성추행범이었고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난희는 불쾌하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할 수 없었다. 절개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그녀에게 혼약은 지켜야 할 중대한 일이었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온화하게 대하는 것이 여성의 도리라는 유교적 교양을 익혔던 터였다.
장희는 한난희와 결혼 생활을 하며 점차 한난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장인 한제에 대한 원한은 풀리지가 않아서 장인의 악행이 생각나거나, 장인이 다시 뻔뻔스럽고 악한 짓을 할 때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화풀이를 해댄다. 물론 장희도 장인의 잘못을 한난희에게 전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친을 배신하고 가문의 몰락에 일조한 장인을 향한 원한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아서 그 부분이 자극될 때마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에게 종속된 채 그의 부당한 취급에 순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한난희는 깊은 우울과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러한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발현하고 해소할 방법도 없었다. 장희가 부친을 거론할 때마다 불쾌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친정의 잘못에 죄스럽고 수치스러워하며 부정적 감정들을 직접적으로 발화하지 못한다. 다음 장면에 그런 상황이 잘 나타난다.
한난희, 남편이 노하는 말이 마음에 자못 좋지 아니하나 자기 아버지 죄가 중하니 어찌 말을 불편하게 하리오. 본대 남편을 소원히 대하는 까닭에 겉으로는 대답을 잘하는지라. 이에 안색을 고치고 말하길, “군자(장희)께 득죄하였으나 다시 잘못하지 아니리다.” 장희 노한 기색으로 종일 누었다가 저녁상을 들여도 먹지 아니하니 소저 나아가 고하길,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것을 가져오리다.” 장희 철석같은 마음에도 유순하고 온화한 말을 들으니 미운 마음이 춘설 녹듯 하여 애처로이 손을 잡고 왈, “이제는 불평한 기색을 다시 보이지 않으려느냐?” 난희 억지로 대답하길, “어찌 군자께 불호(不好)하는 기색을 보이겠습니까?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말씀이니 원통하고 민망합니다.” 장희 기쁘지 않았으나 난희 향한 정이 유다른지라, 가만히 웃고 일어나 밥상에 나와 한술 뜨고 부인에게도 권하였다.
이때 한난희 기운을 참아 앉았으나 남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스스로 생각하되, ‘내 비록 저의 아내이지만 이제 여러 말로 책망하여 휘잡으려 하니 언짢은 마음 크게 일어나는구나’
(<창란호연록>, 5권)
한난희의 불평한 기색이 불만인 장희가 그런 태도를 꾸짖자 난희는 화가 났지만 그 감정을 절제하며 겉으로 사죄의 말을 하고, 삼가는 태도로 순순히 식사 시중을 든다. 그 유순한 태도에 불편한 마음이 춘설같이 녹은 장희가 손을 잡으며 타이르자 난희는 에둘러 답하고 표면적으로는 순종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런 태도와 달리 그 내면은 원한이 사무치고 자신을 공연히 꾸짖고 통제하려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었다.
이처럼 <창란호연록>에는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부부 갈등에서 감정 표출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한난희의 내면과 언행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남편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지 못하는 처지에서 그의 질문에 침묵하고, 다정한 접근에 냉담한 태도로 정서적 거리를 두며, 잠자리를 거부하는 등 수동 공격적 행동을 보이며 남편에게 소극적 저항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응은 둘의 관계뿐 아니라 한난희에게도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수동 공격성은 그 둘 사이 진정한 소통과 화해를 방해하며 갈등을 심화시켰고, 그렇게 발화되지도 해소되지도 못하는 불평한 감정들은 한난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며 그녀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까지 위협한다. 우울감이 심해진 그녀는 정신적 압박을 받으면 토혈, 혼절 등의 신체화 증상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모든 일에 무감한 채 인간관계를 단절하여 사람들과 따뜻한 감정을 나누지 못한다. 아이를 여럿 낳고도 그들을 무릎에 앉힐 적이 없을 정도로 아이와도 정서적 소통을 하지 않는다. 혼인을 하기 전 한난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거리낌 없이 발화하며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는 여종과도 호쾌한 대화를 했었다. 강한 의지를 갖고 가출을 감행하여 유랑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혼인 이후 부부 갈등을 겪으며 누구에게도, 스스로에게조차 진정으로 이해되지 못한 채 긍정적 감정과 의욕을 상실한 듯 살아간다.
그런데 한난희의 수동 공격성은 그 개인의 성격 문제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수동 공격적 행동은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이 금지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환경, 즉 억압적 감정질서의 환경이나 권력의 불균형한 관계에서 약자가 취하게 되는 방식이기도 해서, 조선의 가부장적 유교 문화와 상관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조선은 감정체제가 엄격하게 위계화된 사회로서 위계관계에 따른 감정 표출 허용도에 차이가 컸다. 여성의 묵종을 강조하는 부부 관계에서 여성의 감정은 남성의 그것에 비해 강도 높게 억압되었다. 아내는 남편이 “혹 때리고 혹 꾸짖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당연한 것으로 받들어야 하며, 감히 말대답을 한다든가 성을 내어서는 안 된다.”(소혜왕후, 『내훈』)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무례함을 넘어선 모욕적 언사와 냉대, 때때로 보이는 폭언과 폭행, 강압적 잠자리 등 남편의 노골적이며 직접적인 공격 행동에 대해, 유교적 교양을 내재화한 여성들은 불쾌, 불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부부간 갈등이 격하게 진행되다가 오해가 풀리고 화락한다는 국문장편소설의 관습적인 결말과 달리, <창란호연록>은 부부간 진정한 화해가 이뤄지지 않으며 ‘미완의 구조’로 끝난다. <창란호연록>을 애정서사로 다룬 연구가 많은데, 장인을 원망하다가도 한난희를 사랑하는 마음에 끊임없이 치근대는 장희의 모습을 보면 애정서사로 읽을 수 있겠지만 한난희의 관점에서는 과연 애정서사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난희는 아내로서 남편 장희에게 도의적 책임을 다하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 느낄 뿐 정서적, 신체적 친밀감을 느끼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성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삼고 남성의 필요에 따라 여성을 제어하려던 가부장적 지배질서는 언행은 물론 감정까지 통제하는 전략을 취했지만, 감정은 필요에 따라 간편하게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어서, 상대의 감정을 억압하다가 편의대로 사랑을 요구한다고 사랑하게 할 수는 없었다. <창란호연록>는 한난희를 통해 그런 지점을 잘 보여준다.
*참고자료
국립중앙도서관본 『창란호연록』(김기동 편, 『필사본고전소설전집』 9-10, 아세아문화사, 1980
소혜왕후 한씨, 이민수 교주, 「夫婦章」, 『內訓』, 홍신문화사, 1985
고은임, 「<창란호연록>의 발화되지 못한 감정」, 『고소설연구』 54, 한국고소설학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