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의 부재를 애도하며
연암 박지원의 <정석치 제문>
석치(石癡)가 살아 있다면 함께 모여 곡도 하고, 함께 모여 조문도 하고, 함께 모여 욕지거리도 하고, 함께 모여 웃기도 하고, 몇 섬이나 되는 술을 마시기도 하고, 맨몸으로 서로 치고받고 하며 고주망태가 되도록 잔뜩 취해 서로 친한 사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인사불성이 되어, 마구 토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혀 어질어질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
석치가 죽자 시신을 둘러싸고 곡하는 이들은 석치의 처첩과 형제, 아들과 손자, 친척들인데, 그 곁에 함께 모여 곡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석치 유족의 손을 잡고 이렇게 위로한다.
“훌륭한 가문의 불행입니다. 철인(哲人)이 어찌해 이렇게 되셨는지...”
그러면 그 형제와 아들과 손자들이 절하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대꾸한다.
“저희 집안의 흉액입니다.”
석치의 벗들은 서로 이렇게 탄식한다.
“이런 사람은 정말 쉽게 얻을 수 없는 인물인데...”
함께 모여 조문하는 이들은 실로 적지 않다. 한편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는 법이니까. 세상에는 참으로 삶을 한낱 꿈으로 여기며 이 세상에 노니는 사람이 있거늘 그런 사람이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고 말할 텐데, 하도 크게 웃어 입안에 머금은 밥알이 벌처럼 날고 갓끈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테지.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 귓바퀴는 이미 문드러지고 눈알도 이미 썩었으니, 이젠 진짜 듣지도 보지도 못하겠지. 잔에 술을 따라 강신(降神)해도 진짜 마시지도 못하고 취하지도 못할 테지. 평소 석치와 함께 술을 마시던 무리를 진짜로 놔두고 떠나가 돌아보지도 않는단 말인가. 정말 우리를 놔두고 떠나가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우리끼리 모여 큼직한 술잔에다 술을 따라 마시지 뭐.
박희병, 「정석치 제문」,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2006, 258~259면(일부 수정)
이 글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그의 벗 정철조(鄭喆朝, 1730~1781)가 52세 나이로 타계하자 지은 제문이다. 석치(石癡)는 정철조의 호이다. 제문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 의례적 형식을 취한다. 흔히 그 서두에 언제 누가 제문을 쓰며 망자(亡者)는 어떤 인물이며 글쓴이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을 간단히 밝히고, 망자를 추모하는 말을 늘어놓은 뒤 ‘상향(尙饗)’하고 끝맺는다.
그런데 연암은 제문의 투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석치(石癡)가 살아 있다면~”이라고 시작한다. 파격적으로 시작된 이 제문은 예의 제문들처럼 우리에게 망자의 업적이나 학문, 인간적 특징과 같은 것들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연암의 추억 속에 자리한 석치의 모습인바 이 글은 정석치란 인물의 총체가 아니라 연암과 함께한 석치의 모습, 연암의 삶에서 의미화된 장면에 몰두되어 있다.
석치가 살아있다면 했을 법한 일들은 연암이 그와 함께한 날들의 추억이다. 함께 곡을 하고, 조문을 하고, 욕지거리도 하고, 웃기도 하며,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치고받기도 했던,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익숙한 일들이다. 그런데 “석치가 살아있다면”이란 가정문은 “이제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로 끝나며, 평범했던 일상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음을 확인시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했던 일들이 이제는 현실이 아닌 가정(假定)이 됨으로써 석치의 부재가 공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별안간 연암의 시선은 죽음의 현장으로 옮겨진다.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유족과 친지, 지인들, 평소 그를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고 있던 자들, 그리고 석치의 죽음을 초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인(異人)...
여기서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고 말할” 이인의 태도에는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오히려, 참된 것[眞]으로 돌아간 일이기에 반가운 일이기도 할 터이며, 별반 특별하지도 슬퍼할 일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망자가 “진(眞)으로” 돌아간 것이라 하더라도, 남겨진 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영결을 의미하며 그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와 관계 맺었던 ‘나’의 죽음이기도 하다.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로 시작하는 마지막 문단에서 연암은 벗의 죽음을 재확인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인다. 석치의 현실, 그 구체적인 상황들을 하나하나 나열함으로써 석치의 죽음을 확인해 간다. 귓바퀴는 이미 문드러지고, 눈알도 썩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며, 술을 마시지도, 술에 취하지도 못하는 것이 석치의 현실이며,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연암의 현실이다. 이제는 정말로 석치와 소박한 일상을 함께 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석치를 잃은 공허함은 “정말 우리를 놔두고 떠나가 돌아보지도 않는다면”이라는 독백을 통해 자신을 두고 먼저 가버린 친구에 대한 서운함으로 이어졌다가, “우리끼리 모여 큼직한 술잔에다 술을 따라 마시지 뭐.”라고 끝맺으며, 그의 부재를 서로 위로하고 그를 함께 추억할 또 다른 일상으로 연결된다.
<정석치 제문>에는 벗을 떠나보내야 했던 연암의 슬픔이 농도 짙게 표현되어 있다. 격의 없이 지내던 오랜 친구의 죽음을 두고 점잔을 빼며 그에 대해 포폄하거나, 과장된 몸짓으로 연민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슬픔, 절친한 친구를 잃은 자로서의 비통함이 진솔하게 담겨 있을 뿐이다.
우리는 죽음을 직면할 때, 망자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조차, 그 사실을 바로 실감하지 못한다. 장례 절차를 다 끝낸대도 그의 죽음은 서먹하다. 세상은 달라진 것 하나 없고 나 역시 변한 것 하나 없이 건재하다. 그러나 그와 함께하던 평범한 일상이 더 이상 일상이 되지 못함을 느낄 때, 문득 어제 나누었던 대화를 오늘 이어갈 수 없음을 인지할 때, 불현듯 그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정석치 제문>은 석사 2학기 수업에서 배운 작품이다. 그 수업을 함께 듣고, 함께 웃고, 함께 스터디모임을 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세상의 모든 대화를 나누던 벗이 지난주 향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個人, 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分人, dividual)들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기며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잃는 일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다.(신형철, 2016)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더없이 유쾌하고 편안했던 그와의 시간과 영결하고,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分人)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캣맘이었던 그를 대신해 길냥이 밥을 챙겨주는 오늘도, 그의 부재와, 그와 함께 공부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던 '나[分人]'의 부재를 동시에 실감하며, 그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소노미아(자유와 평등이 상호 연동된 무지배의 세계)를 꿈꾸던 그는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존재들을 더욱 어렵고 귀하게 여기며 자신의 지향을 일상에서도 실천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정반대 성격의 그와 우정을 나눌 수 있던 것은 그런 그의 노력 덕분이었으리라.
몇 해 전 사랑하던 반려묘 용이를 먼저 떠나보냈던 그가,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던 그가, 용이와 즐거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기를 기도한다.
*참고자료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2006
신형철,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 『한겨레』, 2016-10-1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5782.html#csidx5f3844f800f593ab851299e5a35c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