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636~1637)은 물리적, 정신적으로 조선에 큰 충격을 가했다. 여러 항전에도 조선은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했고, 나라 곳곳은 초토화되어 백성들의 고통은 막심했다.
외적의 침입 때마다 결사항전의 거점이 되었던 강화도는 병자호란 때도 조정의 파천지로 결정되었다. 왕자, 비빈이 그곳으로 몸을 피했고 청나라 군에 맞서 항전했지만 방어선이 무력하게 뚫리면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강도몽유록>에는 당시 강화도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여인들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몽유록(夢遊錄)’이란 ‘꿈에서 놀다 온 기록’이라는 뜻으로, 어떤 이가 꿈에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만나고,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거나 관찰한 후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를 취한다. 직접적 현실 비판이 쉽지 않던 조선시대, 역사 비판 의식과 현실 인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대개 남성 작가들이 남성들의 역사 담론을 주로 담아낸다. 그런데 <강도몽유록>의 꿈에 등장하는 인물은 병자호란 때 죽은 여성들로, 주류 역사 담론에서 배제된 그들 자신의 전쟁 경험을 들려준다.
꿈을 꾸는 이는 적멸사(寂滅寺)의 선사(禪師) 청허이다. 어질고 자애로운 그는 병자호란으로 초토화된 강화도에 가서 주인 없는 시신들을 수습하기로 한다. 인가가 모두 폐허가 된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잠을 청하는데,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 다가가서 그들을 엿보게 된다.
웃고 울고 노래하는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곳에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선사가 몹시 기이하게 여겨 다가가서 엿보니, 줄지어 모여 앉은 이들이 죄다 여자였다. (…) 그런데 이들 모두는 놀라고 두려워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서글픈 기운을 띠고 있었다. 선사가 더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연약한 머리가 한 길 남짓한 밧줄에 묶이거나 한 자쯤 되는 칼날에 붙어 있는 이도 있고, 으스러진 뼈에서 피가 흐르는 이도 있고, 머리가 모두 부서진 이도 있고, 입과 배에 물을 머금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 참혹하고 애처로운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고,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었다.
<강도몽유록>, 82~83면.
청허 선사가 보게 된 장면은 참혹한 몰골의 여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섞여 앉아 담화하는 모습이었다. 병자호란 때 죽어간 여인들이 모여 그때의 경험을 나누고 있던 것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여타의 병자호란 관련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여성의 발언은 지극히 삼가야 할 것이었으니 여성 스스로의 기록은 좀처럼 찾기 어렵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나 나만갑의 《병자록》과 같은 남성 문인의 문헌에는 전란 시 여성들의 자결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 언급된다. 그런데 <강도목유록>의 여성들은 서로 다투듯 발언하며 전란에 책임 있는 자들을 구체적이며 날카롭게 비판하고 죽음의 원통함을 토로한다.
한 부인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나랏님이 피란했으니 그 처참함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지만 아아, 제가 운명을 달리한 건 하늘의 뜻입니까, 귀신의 뜻입니까? 그 이유를 찾으면 이르는 답이 있으니, 바로 내 남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편은 재상의 지위에 있었고 체찰사의 임무를 맡았거늘 공론을 살피지 않고 사사로운 정에 치우쳐서 강도의 막중한 임무를 사랑하는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아이는 부귀에 빠져 아름다운 경치나 즐기며 앞날에 대한 계책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 군사 일에 대해 무슨 아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강이 깊지 않은 게 아니요 성이 높지 않은 게 아니었건만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으니 죽임을 당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비의 잘못으로 인한 일이니 그 아이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습니까? 아아, 운명이 기박한 제가 기꺼이 자결한 것도 당연하니 그 일은 한스러울 게 없습니다. (…)”
<강도몽유록>, 83~84면.
유씨의 발언이다. 유씨는 김류(金瑬)의 부인이자, 아버지 천거로 강도검찰사에 임명된 김경징(金慶徵)의 어머니이다. 김경징은 임무를 망각한 채 내분이나 일으키다 청나라 군이 섬에 상륙하자 섬을 지키기는커녕 왕족 일가와 모친까지 내팽개치고 홀로 도망친 인물이다. 당시 자신의 가솔과 가까운 지인들을 강화도로 먼저 건너게 하고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아, 심지어 소현세자빈마저 밤낮으로 굶주리며 기다리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유씨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의 실책을 준엄하게 비판한다.
부인은 마침내 탄식하며 말했다. “저는 왕후의 언니요, 중신의 아내입니다. 평생을 부귀 속에 살며 노래와 춤으로 긴긴 봄을 보냈으니, 오늘날 이러한 일이 있을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아아, 제 죽음이 과연 다른 사람과 같다면 정렬이 스스로 드러나 넋 또한 빛이 날 것입니다. 그렇거늘 못난 제 자식은 일 처리가 그릇되어 적의 칼날이 닥치기도 전에 저의 죽음을 강요했습니다. 스스로 자결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남의 말이 없겠습니까? 남이 권해서 이룬 정절을 세상이 모두 비웃고 욕하거늘, 하물며 오늘날 정문을 내리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강도몽유록>, 87~88면.
여기서 말문을 연 것은 한씨이다. 한씨는 정백창(鄭百昌)의 아내이며 정선흥(鄭善興)의 모친이다. 이때 한씨와 함께 죽은 사람이 열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발언에 따르면 청나라 군이 침입하자 한씨의 아들 정선흥이 어머니께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정선흥이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 권씨의 죽음을 강요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권씨가 강화도에 있던 왕족에게 달려가 살려달라 애원하자 정선흥이 눈을 부릅뜨고 “빨리 죽는 게 낫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어머니든 아내이든 자결을 강요한 정선흥의 행위는 당대 여성들의 삶과 생명을 얼마나 가볍고 포악하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준다.
훗날 정선흥의 부탁으로 이식이 쓴 한씨 묘지문에는 그 죽음에 대해 “다행히 먼저 죽어 이러한 난리를 겪지 않았고 부인은 목숨을 버리고 지조를 지켜 정려를 받았다. 이는 공에게 영광이니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고 쓰여있다. 공식적 기록에서 한씨는 아들과 가문을 위해 기꺼이 자결한 인물로 그려진 것이다. 그런데 <강도몽유록>의 한씨 말에는 아들의 패행과 그로 인한 분함, 자신의 처지에 대한 수치와 한스러움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도 <강도몽유록>에 이어지는 여성들의 발화에는, 남성들의 기록에서 의연한 열녀로 추앙된 여성들이, 실제로 자결하며 떠올렸을 법한 생각과 느꼈을 법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여성들의 전쟁 경험이 일말이나마 그들 입장에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문학은 패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문학은, 존재했으나 역사적 시야에 들어 있지 않은 이들의 삶을 재구해 내며, “일어난 어떤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는 일”(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문에 문학이 때론 현실적으로 아무 힘도 없어 보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필요하다.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 말마따나, 문학은 다른 시공간, 다른 경험치의 삶을 추체험하게 하고, 그것이 지식을 채우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상상력을 계발하여 나와 타자를 더불어 이해하고, 타자를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많은 문제와 가능성을 공유한 존재로 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도몽유록>은(물론 그 작가적 상상력에도 시대적, 문화적 한계가 존재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헤게모니를 지닌 이들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되며 도구화되었던 여성들의 죽음,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입장에서 들려주려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박희병‧정길수 편역, 「강도몽유록」, 『이상한 나라의 꿈』, 돌베개, 2013
마사 누스바움, 정영목 역, 『인간성수업』, 문학동네, 2018
조혜란, 「<강도몽유록> 연구」, 『고소설연구』 11, 한국고소설학회, 2001
김경미, 「실패한 애도의 기록, <강도몽유록>」, 『탈경계인문학』 18‧1,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