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낭자전>과 오늘날의 예실구야(禮失求野)
삭낭자는 전주의 거지이다. 새끼를 꼬아 만든 자루[삭낭(索囊)]를 메고 다니며 밤이 되면 그 안에서 잠을 자기에 스스로 ‘삭낭자(索囊子)’라 이름하였다. 그는 신장이 7척이고 수염이 근사하였으며 얼굴이 맑고 깨끗했다. 나이를 물으면 스물이라 답했는데,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십 년이 지나도 똑같이 답했고 실제로도 늙지 않았다.
서울 안을 오가며 구걸을 했는데 필요 이상의 음식이나 옷을 얻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식가라 여덟 말의 쌀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으며 여러 단지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바둑을 잘 두었다. 서울 사대부들이 그를 자주 불러 바둑을 두었는데 상대가 고수이든 하수이든 관계없이 누구와 두어도 반드시 한 집 차이로 이겨, 이렇게 이기는 것을 ‘삭낭자 바둑법’이라 불렀다. 한 집 차 승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이다.
충익공(忠翼公) 원두표(元斗杓)가 전주의 부윤이 되었을 때 그를 불러 예로써 후히 대접하였는데, 그는 대접한 음식은 먹을 뿐 말을 시키면 사양하며 삼갔다.
얼마 후 종적을 감추었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수십 년이 지나도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고 한다.
<삭낭자전(索囊子傳)>의 줄거리로, 조선후기 문인 담정(藫庭) 김려(金鑢, 1766~1822)의 작품이다. 당대 문인들은 독특한 행적의 이인(異人)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런 인물에 대한 소문이 들릴라치면 인물전을 지어 기록하기도 하였다. 김려 역시 비범한 인물들에 대해 여러 편의 전(傳)을 지어 《단량패사》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고, 그 가운데 거지 삭낭자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 바로 <삭낭자전>이다.
그런데 김려같이 높은 신분의 지식인이 왜 하필 미천한 거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흡사 신선이나 의인과 같은 인물로 그려냈을까?
김려는 노론계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당쟁에 휘말리며 정치적 부침을 겪다가 아버지 대에 이르러 사정이 호전된다.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27세 진사시에 급제하는 등 문재가 뛰어난 인재였으나 정치적 사건들에 연루되며 오랜 기간 혹독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조선 사대부에게 유배란 주류 정치계에서의 배제를 의미하고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큰 좌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지배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가치관에서 거리를 두고 그것의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려에게 정치적 시련은 지배층의 문제를 날카롭게 직시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가까이 실감하면서 삶의 한 부분으로 깊게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여 년 간의 고된 유배 생활 중 각계각층의 인물과 만나면서 그의 문학적 감수성은 민중적 지향을 뚜렷이 하게 된다. 가장 소외된 하층민이나 여성 인물을 문학의 피사체가 아니라 주체로 등장시키고, 때론 중세적 신분 관념에서 벗어난 평등의식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장원경처 심 씨를 위해 지은 시> 中
주인이 이 말을 듣고
머리 숙여 절하고 꿇어앉더니
“한솥밥이야 먹을 수도 있다지만
같은 자리에 앉는 건 죽을죄짓는 거죠.”
(…)
허허 웃으며 파총이 말하길,
“공손도 지나치면 예가 아니지요.
뜻 맞으면 모두 친구이고
정 깊으면 곧 형제이지요.
어찌 하늘의 뜻이
사람 사이에 계급을 나누는 것이겠소.”
주인이 이 말 듣고
마지못해 주춤주춤 섬돌을 올라
무릎 맞대고 정다이 앉으니
신분의 차이가 어찌 있으리
이 시는 백정의 딸 심방주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미덕을 현양한 작품으로, 심방주가 양반 남성 장원경과 혼인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장원경의 부친 파총은 양반임에도 천민인 백정 딸 심방주를 며느리로 삼고 사돈을 예로써 대한다. 이에 김려는 “무릎 맞대고 정다이 앉으니, 신분의 차이가 어찌 있으리”라며 그 관계에 깃든 평등의 사유와 감각을 의미화한다. 하층 여성을 객체가 아니라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도 특기할 만한데, 양반과 천민의 혼인을 그리며 평등한 인간관계를 지향한 지점은 적잖이 파격적이다.
<삭낭자전>에도 김려의 하층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새로운 윤리적 가치와 감수성이 투영되어 있다. 이 작품이 수록된 《단량패사》의 ‘단량(丹良)’은 ‘하찮은 벌레인 반딧불이’를 뜻하고, ‘패사(稗史)’는 소설적인 역사 이야기를 담은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작품집에는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서얼, 의사, 평민, 궁녀, 거지 등 모두 조선에서 ‘타자’로 여겨진 자들에 대한 것이다.
<삭낭자전>의 주인공인 삭낭자는 거지이지만 비굴하거나 비참하게 살지 않는다. 늘 맑고 깨끗한 용모를 유지하는 한편 필요 이상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기꺼이 나누면서 자족적 삶을 산다. 뿐만 아니라 말을 삼가 신중히 하고, 바둑 두는 재주가 비상함에도 이겨 먹으려는 마음 없이 상대를 배려해 딱 한 집 차이로만 이긴다. 김려는 그의 비범성을 단지 신기한 대상, 낯선 타자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불우한 삶의 조건에서도 윤리적 가치를 건강하게 실현하는 신선이나 군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해 냈다.
이처럼 인간의 윤리성을 미천한 처지의 인물에게서 찾는 것은 바로 예실구야의 태도와 결부된다. ‘예실구야(禮失求野)’는 《한서》 <예문지>에 전하는 공자의 말, “예를 잃으면 재야에서 구한다”(禮失而求諸野)라는 구절에서 비롯하였다.
유교적 신분 사회에서 예(禮), 즉 인간의 윤리성이란 본디 양반들의 것이었다. 《예기》에 “예(禮)는 사(士)에 그치고 서인(庶人)까지 미치도록 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서인 즉 백성은 비천하고 빈부가 같지 않으므로 예를 일률적으로 재단해 강요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물리적, 문화적 자원이 많이 필요한 일상의 예를 백성들은 평소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사정을 고려한 구절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예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은 동시에 예법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즉 일반 백성들은 사대부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예적 질서에서 배제된 존재들이며, 예는 사대부들의 문화자본으로 군림했다.
그런데 ‘예실구야’는 예의 담당층이어야 할 사대부에게서 예가 망실되었을 때 도리어 미천하다고 취급되던 ‘재야’ 즉 민간의 삶에서 그것이 찾아진다는 것이다.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로 더 이상 예를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나름대로 건강하게 윤리적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민가의 백성들에게서 예가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려가 미천한 거지의 삶에서 예, 즉 인간적 윤리성을 찾은 것 역시 예실구야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대부들의 타락상에 신물이 난 김려는 건강하고 선량하며 자족적으로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꾸려 살아가는 삭낭자에게서 예적 태도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최근 우리는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 일컬어지는 엘리트 고위층의 독단과 무책임, 무사유와 정서적 나약함 및 비겁함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목도하게 되었다. 동시에 위기와 혼란에 맞서 빛의 혁명을 이룬 평범한 이들의 결기와 지혜, 연대의 위대함을 경험했다. 탄핵과 대선 사이, <삭낭자전>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예실구야’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참고자료
김려, 「삭낭자전」, 『단량패사』,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601A_0100_010_0060_2009_A289_XML)
박혜숙, 「담정 김려-새로운 감수성과 평등의식」, 『한국문화』 17,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96
커버이미지: 한겨레(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1724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