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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 스핀오프의 세계 2

<소현성록>‧<소씨삼대록> 연작의 스핀오프 <영이록>

by 고은임


<영이록>의 주인공 손기는 비범하게 태어난다.


송나라 진종 시절의 이부상서 손일원과 그 아내 가씨는 됨됨이가 너그럽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어진 일을 좋아하고, 의리를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부모 묘소를 살피기 위해 두어 달의 말미를 얻어 낙향하게 되는데, 오랜만에 과거 급제를 기원했던 숭산 북궁에도 들러 분향한다.


이때 하늘에서는 옥황대제가 모든 신선을 모아 조회를 하고 있었다. 숭산의 신이 대제 앞에 나아가더니 태평한 나라에 큰 복을 내려달라 청하며 손일원‧가씨 부부를 추천한다. 이에 옥황대제는 신성하고 신령스러운 청령별의 정령을 그들의 아이로 내려보내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손기이다.


‘고전소설 스핀오프의 세계 1’(https://brunch.co.kr/@f0d27b56d3a6474/18)에서 다뤘듯, 손기는 <소씨삼대록>에서 내성적이고 아둔한 인물로 그려지며 소운성의 조롱감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영이록>에는 그 손기의 일대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져 있다.


<영이록>의 '손기'는 <소씨삼대록>의 '손기'와 크게 다르지 않게 등장한다.


“병이 많아 자주 위태롭더니, 일곱 살이 되어도 말을 못 하고 열 살에도 걷지를 못하였다. 또한 성품이 침착하고 속이 밝았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같이 보였으니 일가친척들이 다 바보 공자라고 불렀다.”
<영이록>, 19~20면.


신성한 존재가 적강한 인물인데도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자라 보이는 아이로 등장한 것이다. 하늘이 정해준 인연으로 형공의 아름답고 정숙한 여섯째 딸 계아와 혼인을 하지만, 아내 계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아름다운 숙녀가 바보 공자와 기울어진 혼인을 했다고 여기고, 급기야 <소씨삼대록>에서와 같이 계아의 제부 소운성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기에 이른다.('고전소설 스핀오프의 세계 1, https://brunch.co.kr/@f0d27b56d3a6474/18)


옥황대제는 복을 내린다면서 어째서 손기를, 소운성과 같이 문무 겸비한 영웅적 인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모자란 인물로 태어나게 했을까?


“지상세계의 벼슬아치들이 좋은 시절을 만나 호걸과 영웅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재주가 많은 사람은 남을 능멸하려 하고, 공을 세운 사람은 동료를 꺼려하니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현재 조정의 이부상서 손일원만은 재주를 가졌으되 남에게 자랑하지 않고, 덕을 베풀되 남이 갚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또한 벼슬이 높아질수록 겸손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옥황대제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입니다.” 숭산 신이 말을 마치자, 옥녀 신선이 옷깃을 여미고 앞으로 나오며 말하였다. “손일원이 착할 뿐 아니라 그 처 가씨 또한 지극히 어질어 부귀하다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고 지아비를 도와 어진 일에 힘쓰니 이 또한 복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영이록>, 17~18면.


지상에 복을 내려달라 청하는 숭산 신은 어느 집을 고르는 것이 좋겠냐는 옥황대제의 물음에 위와 같이 답한다. 천상계 조회에서 숭산 신의 발언은 <소씨삼대록> 소운성에 대한 비토에 가깝다. “좋은 시절을 만나 호걸과 영웅”으로 추앙받는 소운성은 그야말로 “남을 능멸하려 하고”, “동료를 꺼려”한, 재주가 많은 사람이자 공을 세운 사람이다. <소씨삼대록>에서, 손아랫동서 운성과 비교되는 것이 꺼려져 그를 애써 피해 다니던 어리숙한 손기를, 굳이 찾아내어 사람들 앞에서 조롱하고 모욕한, 소운성의 무례와 오만방자함을 의식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소운성의 폐단을 꼬집고 그 대항마로 치켜세운 인물이 “재주를 가졌으되 남에게 자랑하지 않고, 덕을 베풀되 남이 갚기를 바라지 않”으며 “벼슬이 높아질수록 겸손”한 손일원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높이 평가하는 덕목은 남을 이겨 먹는 재능이 아니라 너그러운 덕과 타인을 존중하는 겸손의 미덕이다. 손기는 그런 가문에서 부모의 덕을 이어받아 태어난 아이였다.


소운성은 문무 겸비한 능력자로 유교적 입신양명을 성취한 희대의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한편 그런 운성 앞에서, 그의 손윗동서이면서도 한껏 주눅 들어 자신의 이름조차 또박또박 전하지 못하고 “송기”라 말해버리는 손기는, 사대부 남성인물의 평가 기준이었던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수, 말솜씨, 문필, 판단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소씨삼대록>에서 소운성이 손기를 만나 조롱하는 장면은 <영이록>에도 비슷하게 그려진다. 아둔한 손기는 천정연으로 맺어진 형계아와 혼인을 하지만, 모두가 멸시하는 가운데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은둔하다시피 지내다가, 불순한 의도에 의해 변수 강물 선상에서 운성과 맞닥뜨리고 모욕을 당한다. 구체적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지만 <영이록>은 <소씨삼대록> 장면의 대체를 차용하고 있다. 손기의 구차한 차림과 행동, 소운성에 의해 모두에게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장면이 오히려 더 자세하고 비참하게 묘사된다. 둘의 외모와 태도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운성의 천여덕스러운 깐족거림이 더해져 손기의 초라함이 부각된다.


이후 시 짓기 내기가 이어지고, 손기가 끝내 시를 짓지 못하자 운성은 벌칙으로 손기의 수발을 든 기생의 얼굴에 먹으로 그림 그리게 하고, 손기에게는 큰 그릇으로 세 번 강물을 퍼 먹게 한다.


좌우의 기녀들이 반선을 잡아 화관을 벗기고 얼굴에 먹을 칠하자 반선이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말하였다. (…) 얼굴에 먹을 꺼멓게 그린 반선이 그제야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 채 물 사발을 들고 손기 앞으로 나갔다. 배 위의 모든 기녀와 노복들이 풍채가 좋고 당당하며 말이 빛나고 문장이 출중한 소운성을 칭찬하면서, 손기의 거동을 보고는 입을 막고 웃어댔다. 처음에는 억지로 버티고 앉아 있던 손기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얼굴을 배 밑바닥에 박고 일어나지 않았다. 소운성이 손기가 하는 행동과 강물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취흥이 더욱 높아져 반선을 꾸짖으며 손기의 뒤통수에 물을 부으라고 명하였다. 이때 수모를 당한 손기는 백 마리 잔나비가 뛰노는 듯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한마디도 못하고 다만 자기도 모르게 원통한 눈물이 귀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본 소운성이 황급히 물 사발을 물리치고 엎드려 조문하며 말하였다.
“워낙 재주가 높으신 선생께서 시 한번 읊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슬픈 눈물이 얼굴에 가득한 것을 보니 필연 절친한 사람이 죽었거나 선조의 기일이 가까웠거나 한 까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그것도 모르고 시와 술로 즐길 것을 청하였습니다. 저희의 무지함을 사죄드리며 또한 애도의 예를 표합니다.”
말을 마치고 크게 웃으니 배 위의 모든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영이록> 55~56면.


소운성에게 모멸을 당한 이 경험은 손기를 각성시킨다. 앞서 언급했듯 <소씨삼대록>에서 손기는 이 장면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이록>의 주인공 손기는 이 일에 큰 자극을 받고 그 길로 집을 떠나 여섯 달을 청성관에 머물며 도를 닦는다.


도를 터득하고 돌아온 손기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어리숙한 모습으로 말을 삼갔지만, 대화가 한번 시작되면 거침없이 학설을 설파하는 것이 보통 사람이 미칠 경지가 아니었다. 형씨 가문 사람들은 비로소 손기의 명석함과 겸손한 인품에 감탄하고, 계아의 짝이 군자임을 기뻐한다. 한편 소운성도 손기에 대한 소문을 듣지만 의심하며 냉소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공과 그 아들, 사위들이 모여 다시 변수로 뱃놀이를 가게 된다. 일전에 소운성이 손기를 조롱하고 모욕한 바로 그 장소였다.


모두 가벼운 옷차림에 좋은 말을 타고 가는데, 여전히 손기만은 낡은 두건에 허름한 베옷을 입고 작은 나귀를 탄다. 화려한 차림에 청총마를 탄 소운성은 손기를 비웃으며 마지막에 도착한 이에게 변수 물을 떠먹이자 제안한다. 계아의 오빠 형한림은 운성이 또 손기를 괴롭히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말리지만, 손기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고, 채찍을 들어 한 번 나귀를 치더니 별이 흐르고 번개가 지나듯, 어느 순간 목적지에 도착한다. 반면 소운성의 말은 뒷굽이 무거워져 달리지 못 하고 꼴찌를 하고 만다.


호승심이 발한 운성은 다시 손기를 도발한다. 술에 약한 손기에게 큰 사발을 들이밀며 대작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도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손기에게 술을 강권하기 위해 운성이 먼저 술을 가득 마시는데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오줌으로 변한 것이었다. 운성은 술 사발을 내던지며 하인을 꾸짖는데 손기는 태연히 웃으며 그 술을 가져다 마시고 사람들에게도 권한다. 그런데 그것은 맛이 달고 시원해 신선주와 같았다. 손기는 그렇게 술과 안주를 즐기며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모두의 감탄을 자아낸다.


심술이 난 운성은 이번에는 천도에 정통하게 되었다 하니 음률에도 능할 것이라며, 대뜸 옥피리를 불어보라 건넨다. 손기는 무례한 요구에도 사양하지 않고 피리를 불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가 아득하게 허공에 울려 퍼지더니 곡조가 고조됨에 따라 강물이 치솟고 물고기들이 뛰어오르며 산의 돌이 떨어지고 학 떼들이 날며 울었다. 이어 북을 치는데 갑자기 달과 별이 한꺼번에 어두워지고 큰 바람이 비를 몰고 와 강물의 파고가 거세졌다. 이에 담력이 크고 성품이 맹렬하던 소운성은 눈과 귀를 가린 채 바닥에 엎드려 두려움에 떤다. 손기의 연주가 끝나자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모두가 손기의 신기한 조화와 재주에 감탄하지만, 소운성은 온 기운이 빠진 채 멍하니 있다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일전에 손기가 느꼈던 난처함과 당혹스러움, 공포와 모멸감을 그대로 느끼며 도망친 것이었다.


하늘의 도를 깨우친 손기의 기이한 능력은 소운성에 대한 앙갚음에 활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소운성의 아들이 술사의 공격을 받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손기가 신선의 도를 써 아이를 구하고 술사를 잡아낸다. 그러자 소운성은 비로소 손기의 능력을 인정하며 감사를 표한다.


“제가 평소 안목이 없어 신선의 풍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형님에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영이록>, 98면.


그러면서 자신도 벼슬을 버리고 손기를 따라 신선의 삶을 살고 싶다 말한다. 이에 손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하늘에는 신선이 있고 인간 세상에는 재상이 있으니 천상천하의 그 귀한 것이 다를 바가 없는 법이네. 하늘이 이 나라를 위하여 동서를 세상에 내신 것이니 동서에게는 명재상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릴 운수가 있다네. 어찌 공산에 누워 지초를 씹으며 굶주리며 살겠는가?”
<영이록>, 101면.


<소씨삼대록>의 소운성은 무예가 출중한 인물이지만 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고수한다. 유가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하는 불가 여승을 집에 들였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한바, 입신양명이라는 유가적 이상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며, 수월하게 그것을 성취하고 스스로 우월하다 자부하며 살았다. 때문에 유가적 배움도 태도도 미천한 손기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며 손윗동서에 대한 예우조차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영이록>의 손기는 그런 소운성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보기 좋게 일침을 가한다. 변수에서 당한 모멸을 그대로 되갚아주고, 병든 아들을 어쩌지 못하는 운성을 대신해 도가의 도로써 아이를 살려내며, 가해자를 잡아 죄를 물었다. 더욱이 유학 일변도의 삶을 고집했던 소운성과 달리 삶의 다양성과 여러 가치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이제는 벼슬을 버리고 신선의 도를 따르겠다는 운성을 진정시키고 각자에게 맞는 삶이 있음을 가르친다.


이후 손기는 또 한 번 신이한 능력을 발휘해 천자를 요악한 병에서 구해낸다. 그리고 천자로부터 “누가 손기의 천성이 흐리고 어리석다고 하며 바보 공자라고 놀렸단 말인가? 짐이 보니 문무를 두루 갖춘 진정한 군자로다.” 칭송을 받고, ‘호국천사 충허진인 천하도제교 옥청소용국사 위공’에 봉해진다. 이제는 그를 바보 공자라 놀리던 모두가 우러러보는 천사(天師)가 되고, 자신의 직임을 다해 국사를 돕는다.


<영이록>의 바보 공자 손기는 자신의 재능을 으스대며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소씨삼대록>의 소운성에 대항해, 유학 일변도의 능력주의가 통하는 세속적 삶에 일침을 가하고, 느리고 더뎌 어리석어 보이지만 속 깊고 따뜻한 인물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영이록>의 작가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소씨삼대록>의 소운성이 자타공인 영웅으로 그려지면서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언행조차 용인되는 분위기에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소운성이 손기를 모욕한 장면을 중요한 모티프로 가져와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며, 둘의 우열 관계를 바꿔 변수의 모욕을 통쾌하게 되갚고, 손기가 소운성의 아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함과 동시에, 소운성이 손기를 폄훼했던 것과 달리 누구나의 삶이 가치롭다 인정하는 포용적 태도를 보이게 함으로써, "재주가 많은 사람은 남을 능멸하려 하고, 공을 세운 사람은 동료를 꺼려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다양한 인물의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자료

조혜란 외 역, 『소현성록』 1-4, 소명출판, 2010

임치균‧이래호 역, 『영이록』,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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