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없었지만 더 미련 없다
친정에 온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청소가 뭐라고 자기가 그랬는지. 본인이 하면 되는데. 미안하다고 했다.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다시 오라고 말이다. 부부상담도 받겠다고.
있을 때 잘했어야지... 나는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바뀌려면 뼈를 깎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그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이가 친정으로 나오면서 그 부분이 건드려졌을 거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 '굳이 나와 아이가 아니더라도 그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그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까?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다시 돌아오라는 그의 연락을 받고 나와 아이가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았다. 처음 며칠은 나에게 화내지 않고 아주 잘해줄 것이다. 그 기간이 길게는 한 달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몇 달, 몇 년 동안 유지가 될 수 있을까?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사람이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들 중 화라는 감정은 당연히 있을 텐데 그걸 느낄 때마다 그전처럼 하지 않기 위해 참고 억누르겠지만 언젠가는 그 감정이 터져 나올 것이다. 편안해야 하는 집에서 전처럼 화를 내지 않기 위해 긴장하는 일이 짧게는 가능하지만 길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같이 사는 것이 다시 익숙해진다면 언젠가 그는 그 전의 모습이 나올 것이고 두 번째로 친정에 나와야 하는 그때는 모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것 같다. 너무나도 뻔한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의 마음이 고장 난 근본적인 원인인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그의 폭력적인 문제도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같이 살 때도 그의 의지만으로는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는 상황을 너무나도 많이 봤기 때문에 마음을 먹고 의지를 갖는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나의 생각과는 별개로 부부상담은 진행해 보기로 했다. 별거 전에 부부상담에 대해 얘기했던 게 있으니 숙제하는 마음으로 해보기로 했고 그는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는 친정으로 수박이나 여러 과일들을 보냈다. 부모님과 먹으라며 미안함을 음식으로 표현했다. 부담되니 보내지 말라고 해도 보내왔다.
친정으로 나왔을 초기에는 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올라올 대로 올라온상태라 그의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았다. 뉴스에서 데이트 폭력으로 헤어진 상대와 그 가족에 대한 살인사건을 봤는데 남일 같지 않고 그가 갑자기 친정에 나타나면 어떡하지? 그가 홧김에 나에게, 우리 부모님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라는 막연한 걱정을 하던 때였다.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는 중이었는데 뒤에서 누가 아이 이름을 부르는 느낌이 들었다. 잘못 들었겠지 생각하고 길을 갔는데 좀 더 뚜렷하게 아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 같았고 설마 그일까 뒤를 돌아보니 그가 맞았다. 순간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가 밀려왔다. 가시를 삐죽 세운 고슴도치처럼 예민해졌다.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닌가 방어태세가 되었다. 아이는 어색해하긴 했지만 며칠 만에 만난 아빠를 반가워하며 아빠와 인사를 하고 등원을 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 그와는 별다른 대화 없이 헤어졌다.
나의 불안이 높은 탓인지 갑자기 연락 없이 나타난 그로 인해 혹시 친정 근처에서 나나 아이를 말없이 지켜보고 간다던가 하진 않는지, 스토킹인 건가 싶은 마음에 두렵기도 했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연락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불쾌하니 다음부터 올 거면 연락하고 와달라고.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불쾌하다고 얘기한 건 충격이지만 아이가 보고 싶어서 갔던 거고 연락 못하고 간 건 미안하다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별거부터 시작했지만 그와의 관계를 잘 정리하고 싶었다. 그에게 법원에서 만나 서류 정리하자고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은 오지 않았다. 왜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그에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회를 주었고, 달라지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 나에게 함부로 대했다. 감정쓰레기통이 없어진 그 상실감을 못 견디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친정으로 나오면서 마음 정리를 완전히 했고, 그는 아직 마음 정리가 안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거를 선택한 건 나의 선택이었고, 그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잘 못 받아들이는 건가?' 싶기도 했다. 서류 정리가 되어야 한부모자격을 인증받을 수 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그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랐다.
내가 개인상담했던 상담사님께 부부상담을 부탁드렸다. 나와 그의 경제적 상황을 물어보시고 상담비는 그에게 받겠다고 하셨다. 그마저도 부부상담인데 5만 원이라는 금액으로 배려해 주셨다. 결혼생활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물어보셨고, 떠오르는 여러 이야기들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니 일반적인 경우보다 심하다면서 그에게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고 결과지 제출해 달라고 했다. 그에게 그 내용을 전달했고 그는 병원에 가서 검사 후 나에게 결과를 공유해 주었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 다른 것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울증 중증이라고 나왔다.
온라인으로 부부상담을 시작했다. 친정 나오기 전부터 얘기했던 부부상담이기에 의무감에 시작은 했는데 생각보다 그 시간이 힘들었다. 온라인이지만 그의 얼굴을 봐야 했고 그와 대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혼 없이 하게 되었다.
부부상담은 3회를 끝으로 상담사님이 그만하겠다고 하셨다. 부부상담에 정해진 상담비용이 있는데 나나 그의 상황이 안 좋으니 저렴하게 받는 것도 부담이 되고 상담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셨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상담의 목적이 나만 달랐다. 그에게 이미 닫혀버린 마음이 3번의 상담으로 열리지 않았고, 억지로 마음을 열려고 하는 것 같아 방어적인 부분도 있었다. 나는 재결합의 마음이 없는 상태로 부부상담을 받았지만 그는 재결합을 바라는 마음이었고, 상담사님도 그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상담사님은 상담 후 나에게 따로 연락해서 남자들은 상담의 자리에 나오는 게 어렵고 더군다나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는 건 더 힘든데, 그는 그걸 다 했으니 마음이 많이 열려있다는 것이고, 한 번은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에게 기회를 준 이후의 삶을 그려보아도 희망적인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결혼할 때 내가 원하는 것보다 사명감이라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선택을 했기에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사님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나와 상담사님이 아는 사이인 것 같아서 뭔가 짜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결국 이 부부상담은 셋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미련은 없었지만 부부상담 이후에는 더 미련이 없었다. 해볼 만한 건 다 해봤다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내가 상담사님께 부탁드려서 진행했던 거였는데 마음이 열리지 않은 채로 상담했던 나의 태도에 대해 따로 사과드렸다. 상담사님은 개인상담을 추천해 주셨고 무료상담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부부상담 종료 후 온라인으로 개인상담을 15회 차 진행하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