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급한 재난 상황 속에서 나를 잃지 않아야 산다

파리에서 노란 조끼 시위대 속 동양인, 영국에서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

by 김까치

말로는 쉽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도 정신만 차리만 산다는 말이.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경험을 하게 되면 전혀 다른 양상이 된다. 호랑이 굴에 호랑이가 산다는 것을 모른다거나 호랑이굴이 어둡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단 말인가? 최근 이슈가 된 호르무즈 봉쇄에 따라 잊고 싶은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어쩌면 재난 속에서 어떻게 나는 살아돌아왔는 가를 나누는 것이 불씨를 지피며 온기를 나누는 작은 캠프파이어가 되지 않을까하는 소망속에 글을 써본다. 나는 이 경험을 나누는 것이 너무 싫다. 왜냐하면 너무 무섭고, 너무 두려운 기억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왜 프랑스와 영국에 가게 되었는 지를 설명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프랑스와 영국에는 지극히 내가 일이 안풀려서 간 것이 컸다. 나는 거처를 여러번 옮기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지역은 서울이나 경기권이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극도로 적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 혼자만 생각할 수 있는 곳에 사는 것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어차피 여기서 살아서 무엇을 하나라는 비관론적인 생각에 빠져 그 나이에는 취업을 해야한다는 중론을 다 갖다버린 채 해외에 나가는 미친 선택을 해버렸다. 해외에 나가면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행복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없는 돈을 털어 비행기 표를 사고, 그것과 관련해서 친구는 거기가서 쓰라며 환전을 해줬다. 그 이후로 친구에게 축사를 써주고 받은 돈을 축의금으로 주며 그 빚을 다 갚았지만 지금으로써는 1인분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내 인생 전반에 녹아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나만 그렇게 혼탁하게 느끼는 것은 아닌지 떠나자마자, 프랑스에 노란조끼 시위가 시작되었고 나는 외교부에서 대피하라는 문자를 받게 되었다. 대학교 다닐때 혼자 유럽여행을 20박 22일 떠나고 좋은 기억만 가득했던 나로써는 재난 상황 한가운데 있는 이상황이 이해가지 않았고 한인민박이 아닌 호스텔에 외국인만 가득했던 곳에 있었기에 눈물로써 이상황을 견딜수밖에 없었다.


<출처: 연합뉴스 TV>

하지만 그 상황속에 있었으면서도 여행하겠다고 한 그 꼴값이 무엇이었는지 머무르라는 말을 무시한 채 평상시대로 걸었다가 집시나 아랍인이 많은 사람들쪽에 가게 되었고 나는 거기서 얼마나 나라는 사람이 동양인으로써 튈 수가 있는 것인지 깨닳았다. 그 전에 혼자 여행을 하면서 서명단에 둘러싸이거나 도난의 문제 발생은 그 상황속에 있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중 한명은 내 옷에 침을 뱉고, 내 핸드폰을 뺏어가려 했었다. 하지만 말이 전혀 안통하는 상황속에서 그들은 나에게 강렬한 눈으로 바라보며 알려주었다.


'야!!!! 너 진짜 바보냐? 너 동양인 여자애고 걔 니꺼 훔쳐가려고하잖아. 야. 너 지금 여기 이렇게 있으면 안돼 얼른 도망가 진짜... 야 너 진짜 상황 하나도 모르는구나.. 빨리도망가.. 핸드폰 없음 니네나라 어떻게 가냐? 야 근데 너무 양애치가 너한테 붙었어!!!! 너무 하네 이거는 진짜.'


이런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 남자가 나에게 너 옷에 침이 있는 것 같다고 확인해주겠다고 했으나 나 됐다고 하고 재빨리 뛰어서 도망가버렸다. 어쩌면 삥 뜯으려는 언니들이 기다렸다가 내친구와 나를 쫓아오려고했을 때 같이 뛰어 도망갔던 때가 떠올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도망가서 나는 잠자코 빵이나 먹고 일기나 썼다. 나는 프랑스 파리를 떠날때 기념품도 사지 않았고 다시는 내가 파리따위에 오지는 않는다. '이 개XXX아. ' 도망갔다. 그 뒤로 나는 파리에 파짜도 안보며, 오로지 거기서 먹었던 빵의 맛만 기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정신을 못차렸다. 그 이유는 돌아오자마자 또 나에게 놓인 것은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사무직에 가려고해도 공백기가 길다고 그러고, 또 갇힌 박스안에 내인격이 통통 튀어서 돌아다니는 느낌은 정말 X같다는 말로밖에는 나오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나의 고향같은 영국으로 가자고 해서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가버렸다. 하지만 또 문제가 발생했다. 코로나였다. 어떤 이유로 가겠다고 한 건지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영국은 그 시국에 코로나로 난리가 나지가 않았었다. 그냥 무작정 가면 또 되겠지라는 생각이 모험으로 나를 이끌었다. 문제는 도착하고나서였다. 처음에는 안전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그곳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나는 그곳에서 극심한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흘기고 가거나 머플러로 입을 가리거나 영국인이 "chinese @#(*$(@*$"이러면서 말하는걸 대놓고 들었다. 그걸 들으면서 나는 내가 차이니즈도 아닌데 왜 난리야라고 생각했으나 체류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방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빨래방같은곳에서 살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상하게 동양인에게 폐쇄적으로 변해간단걸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나온 코로나 데이터 수치를 보고서 너무 놀란 점은 2020년 2월 15일에 22명이었던 코로나 감염자의 수치가 2020년 3월 20일 6051명이 되고, 3월 29일에는 23415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수치를 모두 엑셀에 입력해서 보면서 내가 언제 나가야될지 늘 관망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나를 포함해 총 5명이었고 쉐어하우스였다. 나는 그곳 근방에서 라마를 볼 수 있었고, 배도 시간이되면 볼 수 있었기에 그집을 정말 사랑했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무를수록 답이 없어질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질 못했다. 내가 사는 집인데 편히 여기있을 수가 없었고 마지막으로 오쇼젠 타로를 보고 귀국을 결정했다. 내가 오쇼젠 타로를 보았을때 타로의 점괘에 나온 타로점은 The master로 이것이 나온 것을 보자마자 빚을 졌으나 귀국을 결정해버렸다. 그리고 남은 마스크를 주인장과 그집에 사는 분께 주고 와버렸다. 돌아와 관세청에 대단히 민폐를 끼치게 되었는데 다행히 나는 거기서 코로나를 걸리지 않았으나 돌아와 대구에서 코로나가 춘천까지 전파되는 바람에 코로나에 걸려 켈록켈록거리다가 온가족이 코로나로 개고생을 경험하였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 느낀 점은 쓸모없는 나의 경험이 누군가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본다면 하나쯤은 반드시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쓸모가 되게 없는 사람이고, 어떤 것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 것에 대해 늘 통탄함을 금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모든 순간을 지나고 이 경험위에 앉아보니, 그런 과정 속에서 어떤 것도 다치지 않고 그저 돈만 빚진 채 목숨은 또 이어가는 이 삶의 이유가 나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이제야 직감한다. 그러한 상황에 있으면 주변 시야가 극도로 좁아질뿐 아니라 잠시 경유할 수 있는 곳에 닿았다는 안도감이 닿을지모르나 최종목적지에 닿기전까지 숨을 쉴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내가 약해진 것을 노리는 것은 결국 또다른 약탈자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곳에 이끈 것도 나였지만 그곳에서 벗어나 결국 '죽음'이 아니라 '삶'을 택하게 한 것도 나였으므로 재난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좌절할 필요도 우울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을 기회로 만드는 것또한 나니까.






내 인생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 인생이 될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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