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사랑하는 것에 답이 나오는 것을.
나는 솔직히 이러한 글을 쓰는 것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숨기고 싶은 것이 까발려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누군가 세뇌시키는 것을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선택할 자유는 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자존감 상승' '낮은 자존감을 탈피하여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에 빠져있었다. 그러한 사고의 근간에는 마리사 피어가 지은 '나는 오늘도 나를 응원한다'가 숨어있었다.
이 책들을 보면, 자존감을 올리는 다양한 방법이 나와 있다. 이중 나는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확언을 하며, 녹음을 했고 들으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들으면서 이상한 점이 무엇이냐면 그러한 말을 아무리 내가 내자신에게 해도 그게 쉽사리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내가 너무 납득이 가지 않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내 자신에게 내가 해주었는데도 내 자신이 내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보는 내 모습을 보며,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이성과의 사랑에서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다. 나는 A가 좋다, B는 안좋다. 근데 내가 B가 좋다고, 사랑한다고 해봤자 A가 안좋아지는 것이 아닌데 이것을 확언이라는 행위 하나만으로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강요한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본인의 마음이 바뀌어야 가능한 것인데 확언 하나만 한다고 모든 것이 바뀌었으면, 좋은 말만 하고 다녀야 한다는 그 논리에 대해 나는 내 자신에게 거북스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나아가 날마다 좋아진다를 외쳐도 취직을 하고 자리를 잡는 친구의 모습을 보거나 -5000원이 날아간 주식창을 바라보며 이것은 사이비가 할법한 말이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와 다르게 어떤 방식이 나에게 더 큰 도움이 되었는 가를 생각해보면, 한의사 최인원 선생님께서 쓰신 돈복을 부르는 EFT였다. EFT의 방식은 혈자리를 두드려 거기에 얽힌 에너지를 풀어주는 방식을 택한다. 사실 이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기치료니, 무엇이니 하면서 사이비스럽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으나 혈자리를 눌러주어 풀어주는 방식은 몇천년의 고증을 거쳤다는 것인데 그럼 한의학 자체가 다 사이비라는 것인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오늘 하루 어떤 것이 감사했는 가에 대해 생각하고 적어보는 일을 한다. 오늘 사탕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을 적는단 뜻이다. 실제로 이것과 관련하여 감사일기를 씀으로써 화를 절제했다고 하는 사람이 다큐로 나왔고, 이에 따라 적어보니 나도 나아짐을 느꼈다.
https://youtu.be/w7Jx-Vv57Fk?si=NEL2h59lF8M5LZ-D
문제는 감사함을 아무리 적어도 어쩔때는 위선갖고, 어쩔때는 거짓말 같은 그 아리쏭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사실상 자신의 바보같고 어리석은 면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인데 이것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건들수록 심리상담을 피해가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보는 연습을 해야하는 것 같다. 완벽주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자조적 자소설에서 장점과 단점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고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완벽주의가 있는 것이 단점이지만 세심하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는 것다. 우유부단하다는 단점 역시 신중하다는 것으로 치환될 수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장점과 단점이 또 파악이 안되는 것으로써 그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평상시에 하는지를 관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이 왕따가 되는 세상속에 자신이 놓여봐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을 올린다고 하는 것은 말이 좋지만 실제 행하는 것은 가시밭길 그자체로 나를 알고 알아도 끝이 없는 것과 관련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한 나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