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야기』-8

8 청승맞은 진달래꽃 붉은색

by 현목

산을 휘돌아서면 갑자기 좌우로 확 트이고 양쪽에서 먼 곳에 있는 산들이 보입니다. 약간은 골짜기 같은 그곳에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섰습니다. 솔방울들이 무슨 짐승의 까만 똥처럼 달려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면 솔과 솔방울이 가려서 파란 하늘빛이 솔잎 사이로 겨우 뚫고 나옵니다. 밤색의 코르크 같은 피부의 소나무껍질이 메말라서 터져 있습니다. 이곳에 서면 바람이 언제나 휘휘 지나갑니다. 아마도 바람도 지나다니는 길이 따로 있나 봅니다. 산모퉁이 돌 때까지 잠잠하던 것이 여기만 오면 바람은 펄럭이며 달려갑니다.


봄비는 여기까지 오자 숨이 찼습니다. 바람에게 자신을 맡겨버리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바람이 가는 데까지 갈 볼 요량이었습니다. 예비군 참호 주위에는 풀들이 무성한데 사람이 밟은 흔적은 없었습니다. 거기를 지나니까 멀리서 진달래의 청승맞은 붉은색의 꽃봉오리를 만날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보기로 했습니다. 겨우내 자신들의 꿈속에서만 놀다가 이제 잠시 정신이 들었는지 그들은 붉게 꽃봉오리 속에다가 자신의 의식을 집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봉오리는 무언가 이 계절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봄비는 진달래가 하필이면 그런 붉은색을 띠는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진달래 속은 한겨울 내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맺힌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봄비는 진달래에게 다가가서 자신을 다 주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위축되어 도로 움츠러들까봐 마음을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드러운 비를 한껏 몰고 와서 다 쏟아부었습니다. 진달래는 물기를 머금고 스스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른 체 하고 그냥 듣기로 했습니다. 괜히 아는 체하고 다가서면 도로 말문을 닫아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진달래는 그 옛날에 누군가를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얼굴이 발갛게 되는 것을 봄비는 훔쳐보았습니다. 독백하듯이 자신의 기억을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진달래 자신이 좋아하는 그를 다가갈수록 상대는 몸을 피하고 모른 체 하였습니다. 그러자 진달래는 그저 그런 마음을 품고만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라는 개체는 진달래에게 사라지고 그리움이라는 개념만이 남아서 응어리지더니 봄이 되면 이렇게 꽃이 피더라는 것입니다. 꽃이란 다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진달래는 도로 침묵하였습니다.


봄비는 진달래에게 다가가서 전부 다 훑고 지나갔습니다. 바람골의 바람도 한몫 거들기는 했지만 이런 상념이 바람에게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무엇이든지 흔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꽃이건 솔잎이건 흔들어놓고 가버립니다. 그것으로 인해 무엇이 결과로 되든 그는 상관없는 물건이었습니다.


봄비는 대지를 적시면서 오랜만에 진달래 위에 머물면서 안식을 취했습니다. 이 짧은 계절 동안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쉴 틈이 없었습니다. 봄비는 앞으로만 걸어가야 했습니다. 추억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면서 주어야 할 메시지를 던져놓아야 합니다. 봄비는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는 선이 아래로 죽죽 그어져 갑니다. 하늘에서 내리지만 하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잠시 지상에 서서 운명에 자신을 맡기고 눈먼 사람처럼 걸어가야 합니다. 그가 지나간 다음에는 분명히 뭔가 일어나고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려고 할 틈도 없습니다. 가야할 곳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만끽하려면 부지런히 다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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