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야기』-9

9 슬픔이 없다면 마음이 없다

by 현목

한없이 내려가기만 했습니다. 아무리 내려가도 어딘가 도달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닫히고 침잠하여 한마디 말도 하기 싫었습니다. 주위에 들리는 것은 걸어가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아니 그것만이 귀에 들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만 갔습니다. 자신은 그것이 내려간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가로로 흘러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그것이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음 속에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치였습니다. 슬픔을 비웃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것은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포기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포기라기보다도 말없는 항의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지 몰랐습니다.


울음이란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뱉고 싶었습니다. 이젠 그런 것마저 그의 안에는 한올도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럴수록 세상은 봄비 등뒤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왔습니다. 그것마저 떼어낼 힘도 의욕도 없이 그저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제풀에 지쳐 물러가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어차피 생명이 있는 동안은 그것은 한배를 탄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슬픔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일부러 외면하기로 했습니다. 슬픔 앞에 있어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조금 편하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않고 담을 쌓고 남으로 대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혼자라는 걸 뼈속까지 느끼지만 혼자인데도 고독하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날마다 그걸 보여주었습니다. 봄비 속에는 어느 정도 세상을 하대하는 느낌마저 들고 삶에 대한 승리를 맛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수를 전제로 한 대처였습니다. 봄비가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삭아져 내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력으로 이 세상을 군림하며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런 날이었다고 가슴을 펴고 지나갔습니다.


봄비는 자신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걸어갔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럴수록 공허해진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 전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승리의 휘파람을 불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마음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봄비는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기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슬퍼도 울지 않고 기뻐도 웃지 않는 로봇이 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승리라고 불렀는데 그 모습을 보자 기절초풍을 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것은 봄비 아는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완전히 딴 개체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울고 웃고 기뻐하고 떠들고 들떠 있고 슬퍼하고 우울하던 그런 봄비 아니었습니다. 봄비 자신을 보자 그제서야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한 분노가 이제야 서서히 끓어올랐습니다. 일부러 덮어두었던 곳에서 울음이 왈칵 치솟아 올랐습니다. 봄비는 그것을 보는 것이 두려워서 자신을 속였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진실을 보니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초라하더라도 자신이 자신인 것을 보는 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비교라 할 것도 없이 이제 내리던 빗줄기 속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디선가 봄비가 내려야 할 나무들이 보였습니다. 간밤에 봉오리를 맺고 있는 벚나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생을 다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봄비는 가볍게 춤을 추듯이 빙그르르 돌더니 벚나무 위에 사뿐이 내려 앉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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