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야기』-16

16 봄비의 변신

by 현목

16 봄비의 변신



가루 같이 날리는 봄비는 하염없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전혀 무게를 느끼지는 못하면서 점도 안 되는 부피를 가진 무수한 물방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려가는 중력에 의해 방울이 살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래 만해져서 어느 양철 지붕에 다다닥 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바람에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랬습니다. 아스팔트 길에 내리니까 파파팍 하고 부서져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봄비가 보기에도 재미있고 신기하였습니다. 까짓것 하고 이제는 주먹만하게 자신을 부풀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서서히 불면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햇빛이 비치니까 방울에 무지개 빛깔이 새겨져 일곱 가지 색을 두른 빗방울이 이제는 내려가지 않고 시냇물을 이루어 떼를 지어 흘러갔습니다. 점점 아래위로 두터워져 완전히 지상의 위를 달리는 고가도로처럼 거대한 물방울의 시냇물이 흘러갔습니다.


누군가 트럼펫을 불었습니다. 힘을 느끼게 하는 소리가 밀고 오더니 물방울들을 앞으로 밀었습니다. 방울들이 이리저리 쏠리더니 스스로 뒤죽박죽이 되어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터지는 그 속에서는 이제 막 낙화하는 벚꽃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가을날 초등학교 아동들의 운동회에서 보듯이 큰 바구니를 터뜨리면 좌르르 떨어지는 종이 조각처럼 하늘을 날았습니다.


벚꽃은 마치 생명이 있는 생물처럼 자기들끼리 날리더니만 조신하게 나무 그늘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그 나무 아래에는 누군가가 소줏병을 앞에 놓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과 귀로 꽃잎이 휘날리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잔을 입에 대고 삼키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벚꽃으로 가득차버려서 이제는 아무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속에서 봄비도 벚꽃과 함께 딩굴었습니다. 이제는 비와 벚꽃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벚꽃이 봄비 같기도 하고 봄비가 벚꽃 같기도 했습니다. 누구 누구인가를 구태어 가린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주먹만한 빗방울이 아니라 집채만한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빗방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틀린 것 같네요. 그것은 거대한 물기둥이었습니다. 사정없이 폭탄처럼 투하된다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벚나무에게 목련에게 개나리에게, 진달래에게 산수유에게 라이락에게 나무란 나무에게 내렸지만 신통하게도 소나무는 피하더군요. 아마도 내리면 솔잎에 찔려서 폭발할까 봐 그런 것 같기는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낙화가 아니라 분홍빛 물길이 되어서 흘러갔습니다. 그 속에는 달도 별도 들어 있었습니다. 해는 없었습니다. 해는 위에서 비췄습니다. 노랫가락이 있었다면 그건 잘못 들었을 것입니다. 침묵의 강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나무들도 그 흐르는 물에 자신들을 다 내어놓고 넋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다 살다 봄비가 이렇게 내린 적은 살아 생전 처음 있는 일이기에 망연자실 하면서도 그렇게 싫은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살을 다 담그고 나니 메마른 가지에서 파란 싹들이 돋아났습니다. 그 싹들은 어디선가 들리는 음조에 맞추어 흐느적거리면 해초처럼 펄럭거렸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일어나서 걸어갔습니다.


봄비는 이제는 자신이 가야할 길이 여기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는 긴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먼지 만한 빗방울, 주먹 만한 빗방울, 집채 만한 빗방울이 모두 한곳으로 모여서 저리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무슨 일이 틀림없이 벌어질 것 같아서 뛰어가보았지만 그들은 언제 한 몸이 되었는지 황토길을 살며시 적시며 걸어갔습니다. 어디선가 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지상으로 내려꽃혔습니다. 상큼한 공기가 그 빈 공간으로 밀고 들어와서 차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