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김현균

시인과 진정성

by 현목

문학이라고 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정도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라는 존재는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을 뚫고 시가 내가 왔다』를 읽으면서 정치적으로 항상 불안해 보이는 남아메리카에 이런 문학가도 었었던가 싶게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이 책에서는 루벤 다리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카노르 파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처음 듣는 이름이고 파블로 네루다는 노벨상을 받았고,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100편의 사랑 소네트』라는 시집이 있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파블로 네루다를 보고 나서 제가 느낀 것은 과연 시인 자신의 삶의 모습과 시 자체와 양립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탁월성은 작가 개인의 품성의 완성도와는 별개인 것인가 하고 다시 반추(反芻)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루벤 다리오, 세사르 바예호, 니카르노 파라에 대해서 일별(一瞥)해 봅니다.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 (1867-1916)


니카라과 출신의 시인입니다. 그가 주창했던 시 운동이 모데르니스모라고 복잡한 얘기를 하는데 어림잡아 모더니티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정지용에 해당되는 인물이 아닌가 혼자 짐작해 보았습니다.


예일대 교수인 곤살레스 에체바리가 다리오의 문학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루벤 다리오는 스페인 시를 그 이전과 이후로 양분한다. .. 다리오는 프랑스 고답파와 상징주의의 미학적 이상과 열망을 받아들여 스페인어권 문학을 모더니티로 이끌었다」 그의 「백조」라는 시를 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왜 탁월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바야흐로 인류에게는 신성한 순간이었네./예전에 백조는 오직 죽을 때만 노래했지./하지만 백조의 바그너풍 노랫가락 들려왔을 때는/여명이 한창이었고, 다시 태어나기 위함이었네.//인해(人海)의 격랑 위로/백조의 노래 들려오네, 끝없이 들려오네./게르만의 늙은 신 토르의 망치소리와/앙간티르의 검을 찬양하는 나팔소리 잠재우며./오 백조여! 오, 신성한 새여! 전에는 순백의 헤레네가/레다의 청란(靑卵)에서 더없이 우아하게 태어나/불멸의 미의 공주가 되었다면,// 지금은 그대의 흰 날개 아래서 이상의 화신인/영광 속에 새로운 시를 잉태하네.’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 (1892-1938)


페루 출신의 시인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고통의 시인이라고 합니다. 시 중에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이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와 비교가 됩니다. 공산주의에 경도된 것은 공통점이지만 네루다는 시집이 30여 권이나 되는 데 비해 바예호는 고작 시집이 네 권입니다. 네루다는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쥐었지만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페루에서 떠나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나중에는 파리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습니다. 네루다의 시인으로서 진정성을 저는 의심합니다만 바예호의 시는 자신의 화신으로서 절규로 다가옵니다.


정현종 시인도 바예호의 ‘비상한 진정성’에 주목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가 있고 또 그것들을 평가하는 기준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떤 종류의 작품이든지 간에 그게 진짜냐 가짜냐 하는 걸 판별하는 궁극적 기준이 진정성이라고 할 때, 바예호는 진짜 시인임에 틀림없다. 읽는 사람의 가슴을 흔드는 그 고유의 강렬함과 밀도는 또한 그의 비상한 진정성의 소산인 것이다.」


바예호의 시 「비참한 저녁 식사」를 봅니다.

‘이제껏 고통을 겪었는데 언제까지/의심을 품고 살아야 하는 걸까…/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식탁에 앉아 쓰라림을 삼켰다. 배가 고파/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우는 아이처럼…//끝없는 아침나절, 누구도 아침을 거르지 않고/타인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건 언제쯤일까./이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한 적 없는데,/언제까지 이 눈물의 계곡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


진솔한 진정성은 절절히 느낄 수 있지만 시로서의 시적 장치가 빼어나게 구사되고 있는지는 저로서는 의문이 듭니다만. 참고로 바예호는 기형도 시인과 공통점이 많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니카노르 파라(Nicanor Parra) (1914-2018)

칠레 출신의 시인인데 엄청 장수했군요. 니카노르 파라의 시적 태도를 나타내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시를 청산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 다시 말해 그의 시적 지향점은 이른바 반시(反詩)라고 합니다. 기존의 엄숙한 시를 비판하고 은유니 뭐니 하는 어려운 소리하지 말고 일상적인 언어로 시를 쓰자고 합니다.


파라는 시적 장치로 유머와 아이러니, 패러디를 사용합니다. 일상과 시는 구분되지 않으며 시는 생활필수품과 같다고 주장합니다. 파라의 시 「주기도문」을 보면 패러디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온갖 문제를 짊어지신 채/세속의 보통 사람처럼/오만상을 찌푸리고/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더는 저희를 생각하지 마소서.//문제를 해결하지 못해/괴로워하심을 이해합니다./당신께서 세우시는 것을 모조리 부수면서/악마가 당신을 괴롭힌다는 것도 잘 압니다.//악마는 당신을 비웃지만/저희는 당신과 함께 눈물 흘리오니/낄낄대는 악마의 웃음소리를 괘념치 마소서.//불충한 천사들에 둘러싸여/어딘가에 계시기는 할 우리 아버지/진심으로 더는 저희 때문에 고통받지 마소서/당신은 아셔야 합니다/신들도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며/저희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파라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시인으로는 황지우와 박남철을 들 수 있다고 합니다.


네루다 파블로(Pablo Neruda) (1904-1973)


칠레에서 출생한 시인입니다. 그는 예컨대 세사르 바예호와 비교하여 단순하기보다는 복잡한 인간입니다. 시인이자 이념 지향적인 정치가이며 동시에 여성 편력이 심했습니다. 공산주의에 편향되어 심지어 스탈린을 끝까지 존경했다고 하며 스탈린 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이념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70만명이나 숙청했다고 하는 인물을 숭배했다는 것이 정치가로서는 몰라도 시인의 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자기모순인 것은 집이 세 채나 있고 부와 명예를 누렸다고 하니 그의 이념의 순수성마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격정적 시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의 시적 감수성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념이라든가 관능이라든 하는 점에 저항감을 느끼지만 그의 시적 감수성은 역시 대가라고 찬양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가 찬 상상력의 은유가 번득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의 소개를 읽고 주목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진정성입니다. 그는 여성 편력이 심했습니다. 책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거명된 여자만 해도 여섯 명이고 그 중에 셋은 결혼한 여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20년 연상입니다. 『100편의 사랑 소네트』를 써서 세 번째 부인 마틸데에게 헌정했다고 하는데 그 순간 그에게서 지나간 여인들의 피눈물은 그에게 안중에도 없었을까요. 아무리 시가 우수해도 이것은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틸데와 당시에는 네루다는 불륜관계였다는 것입니다. 네루다는 『이슬라네그라의 추억』에서 델리아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온화한/행인,/저 아련히 울리는 음향의 시절/내 손을 묶고 있던 강철과 꿀의 실 한 올……/한 남자가 한 여자와/헤어지는 것은 증오해서가 아니라/성장하기 때문.’


네루다 이 양반, 이건 양심도 없는 것 아닌지. 이혼하는 이유가 델리아의 성장을 위해서라니. 차라리 당신은 너무 늙어서 밤일을 할 수 없어 당신을 체인지한다고 말하면 솔직하다고 그나마 동정이라도 받을 겁니다. 이건 이혼한 델리아를 모욕하는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네루다의 여인 편력을 볼 때 그에게서 문학적 명성의 배경을 제거하고 나면 심하게 말하면 그는 시정잡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뛰어난 시적 업적 때문에 그를 위해서 저자가 말하듯이 ‘우아한 변명’을 해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요즘 시대는 시도 픽션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만 예전에는 시는 시인 자체의 모습인 것으로 대부분은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시 자체는 서투르더라도 그의 ‘진정성’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네루다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가 비록 시적 기교는 출중하였지만 적어도 그의 사랑에 관한 시를 가지고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의 시를 몇 편 감상해 봅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중에서 나오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난 봄이 벚나무와 하는 행위를/너와 하고 싶다’

사랑의 행위(coitus)를 봄과 벚나무에 빗대어 말하다니 기똥차기는 차다고 인정하면서도 뭔가 찝찝합니다. 저로서는 ‘시가 내게로 왔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 「시」보다는 「양파를 기리는 노래」가 단순하면서도 은유적 상상력이 뛰어난 시로 느껴집니다. 비록 뒤편에 가면 ‘민중’ 운운이 나와서 약간 김은 샙니다만.


‘양파여,/반짝이는 플라스크여,/한 꺼풀 한 꺼풀/너의 아름다움이 빚어졌다,/수정 비늘들이 너를 불렸고/컴컴한 대지의 비밀 속에서/이슬 같은 너의 배 동그래졌다.(…)/남새밭 검 같은 너의 이파리/태어났을 때,/대지는 너의 투명한 알몸 보여주며/차곡차곡 힘을 쌓았다,/아득한 바다가 아프로디테의/가슴을 부풀려/또 한 송이 목련을 피워냈듯이,/대지는/그렇게 너를 빚었다,/유성처럼 밝은/ 양파여,/변치 않는 별자리여,/동그란 물 장미여,/넌 가난한 사람들의/식탁/위에서/반짝반짝/빛날 운명을 타고 났다/’(중략)


마지막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느끼한 시를 한편 감상해 봅니다. 「작은 아메리카」, 여기서 ‘작은 아메리카’는 마틸데의 몸을 가리킵니다.


‘지도에서 아메리카의/형상을 바라볼 때,/사랑이여, 난 그대를 본다./그대 머리의 구리 산정, 그대의 젖가슴, 밀과 눈(雪),/그대의 가느다란 허리,/세차게 흐르는 강, 감미로운/언덕과 초원./마침내 남부의 추위 속에서 그대의 다리는/한 쌍의 황금 지형을 끝마친다.//사랑이여, 내가 그대를 만질 때/나의 손은 그대의 감미로운 곳/뿐만 아니라,/나뭇가지와 대지, 과일과 물,/내가 사랑하는 봄,/사막의 달, 야생의 비둘기의/가슴,/ 바닷물이나 강물에/닳아진 돌멩이의 매끄러움,/그리고 목마름과 배고픔이 눈을 번득이는 붉은 풀 숲 또한/더듬어 거닐었다./드넓은 내 조국은 그렇게 나를 받아들인다./작은 아메리카 그대 몸속에.’


여기서 자칫하면 선정적인 싸구려 시가 되려는 것을 역시 대가답게 은유적 장치를 구사하여 차원을 높여 버립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복잡합니다. 부와 명예를 쥔 선동 정치가요 시인입니다. 그의 시인으로서의 출중한 실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적어도 그가 사랑시에서만큼은 진정성이 있는 시인이었지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