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걸인

by 현목




연산역 12번 출구, 햇빛이 비집고 들어와 앉은 세 갈래 길에

걸인이 묵언의 골판지를 깔았다 고결의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호구(糊口)의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렸다 얼굴에 울렁거리는

구토를 검은색 모자가 덮고 눈동자에 배짱이 반짝인다 부처처럼

벌린 손은 행인을 향한 것은 아니다 정물은 침묵 속에 숙고한다

밖에서 육체에 도달하는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소리도 빛도 그의

몸에서 나오는 어떤 신호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 행인은

그가 던진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인 줄도 모른다 검은 옷이

누구를 장송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위한 장송인지, 스쳐

지나가는 행인을 위한 장송인지…… 골판지 위에 천 원짜리

지폐가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다 세상의 가치를 가늠한다 혹시

장자가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알아볼까 봐 얼굴을 가리고

제물론(齊物論)을 강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