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풍경에 대한 관찰과 상상력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을 때마다 그 유명한 첫 문단,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에서 몇 발자국 더 못나가고 끝까지 읽는 데 매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 읽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하였고 마음 먹은 대로 되었습니다. 책의 유명세만큼 제가 알지 못하는 것도 제법 발견했습니다.
우선은 너무나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서 읽은 감상을 적는다는 게 부담이 됩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언급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가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제가 느낀 점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서양 무용에 대해 평론이나 쓰면서 이른바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島村)가 도쿄와는 생판 다른, 눈이 와도 너무 오는 지방으로 가는 터널을 빠져나와 적어도 삼년에 세 번 이상 찾아와서 게이샤인 고마코(駒子)와 사랑하는 얘기가 주된 스토리로 됩니다. 시마무라는 아내도 자식도 있는데도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기생인 고마코와의 연애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감정 표현은 일본 문화인지 모르겠으나 어떤 면은 이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면은 우리 현실과는 맞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마코는 이제 겨우 스무살이 될락말락하고 시마무라는 적어도 40대 전후인 것 같습니다. 게이샤인 고마코가 시마무라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신분 때문에 혹은 상대가 유부남이기에 마음이 오락가락 하는 그녀의 갈등이 애처롭기도 하고 동정이 가기도 합니다.
시마무라도 가정을 가진 자로서 게이샤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어떤 경계에 서서 자신의 신분을 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에 신비로운 여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소설의 첫 장면에서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면서 같이 시마무라와 동행했던 요코(葉子)라는 여성입니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에는 이 여자가 시마무라의 연인이 되지 않나 하는 예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에 대해서는 그녀의 깨끗하면서도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만 이 요코에 대해서는 ‘청명하여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라든지, ‘뭔가 서늘하게 찌르는 듯한 처녀의 아름다움’라든지, 라는 식으로 요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마코의 육체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정신적이랄까 하는 감상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코는 실제로 시마무라에게 대한 자신의 감정을 그다지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고작해야 ‘요코는 얼핏 찌르듯 시마무라를 한번 보았을 뿐, 말없이 토방을 가로질러 갔다.’ 라는 식으로 요코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시마무라 혼자서 짝사랑하는 꼴이 된 셈입니다. 실제로 소설에서 요코의 분량은 고마코에 비해 훨씬 작습니다.
더욱 더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치 방에서의 화재로 말미암아 요코가 느닷없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실 의미가 있으려면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려고 하는 주제에 맞물려 들어가야 하는데 저로서는 딱히 그렇다고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 『설국』의 진정한 가치는 저로서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식의 러브 스토리야 모양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이 『설국』이란 소설을 명작으로 불리게 된 데는 저로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자연 풍경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그분의 상상력이 커다란 원인이라고 감히 생각되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그 자연 풍경에 대한 묘사는 몇 번이고 읽어도 신선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연필로 밑줄을 그었던 부분들을 여기에 다시 복기함으로써 다시 한 번 저의 마음을 흔들었던 문장들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하고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 관사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기차의 차창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거울처럼 보임---글쓴이)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 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 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요코)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위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흰 눈 빛에 가옥의 낮은 지붕들이 한층 낮아 보이고, 마을은 고즈넉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나비는 서로 뒤엉키면서 마침내 국경의 산들보다 더 높이, 노란빛이 희게 보일 때까지 아득해졌다.
-그 목덜미에 삼나무 숲의 어두운 푸른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자갈 많은 강물 소리만이 감미롭게 들려왔다. 삼나무 사이로 건너편 산골짜기에 그늘이 지는 것이 보였다.
-냉기가 한꺼번에 방안으로 흘러들었다. 멀어지는 기차의 울림이 밤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들은 검은 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셈인지 온통 영롱한 흰 눈으로 뒤덮인 듯 보였다. 그러자 산들이 투명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늘과 산은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산골짜기엔 일찍 응달이 지고, 어느새 차거운 해거름이 내려와 있었다. 어두컴컴하여 아직 서쪽 해가 눈 위에 비치는 먼산들이 성큼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이윽고 제각기 산의 원근이나 높낮이에 따라 다양하게 주름진 그늘이 깊어가고, 봉우리에만 엷은 볕을 남길 무렵이 되자, 꼭대기의 눈 위에는 붉은 노을이 졌다.
-먼 산들은 눈이 자욱할 때와 같은 부드러운 우윳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극장 벽도 없고 청중도 없고 도시의 먼지도 없어, 소리는(샤미센의) 다만 깨끗한 겨울 아침을 맑게 지나며 멀리 눈 쌓인 산들까지 곧바로 울려 퍼졌다.
-구름이 끼어 응달진 산과 아직 햇살을 받고 있는 산이 서로 중첩되어 음지와 양지가 시시각각 변해 가는 모습은 왠지 싸늘해지는 풍경이었다.
-길은 얼어 있었다. 마을은 추위의 밑바닥으로 고요히 가라앉았다. 고마코는 옷자락을 걷어올려 오비에 찔러 넣었다. 달은 마치 푸른 얼음 속 칼날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개울을 따라 이윽고 너른 벌판으로 나오자, 신기하게 깎아지른 정상으로부터 완만하고 아름다운 사선(斜線)이 멀리 산기슭까지 뻗어 내린 능선 위에 달이 떠올랐다. 들판 끝, 단 하나의 볼 거리인 그 산의 온전한 모습을 엷게 노을진 하늘이 짙은 남빛으로 선명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날개(나방의)는 훤히 내비치는 엷은 녹색이었다. 여자 손가락 길이 만한 날개였다. 맞은편 국경의 산들이 석양을 받아 이미 가을빛을 띠고 있어, 이 한 점 연녹색은 오히려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앞뒤 날개가 서로 겹쳐진 부분만 짙은 녹색이다. 가을 바람이 불자, 그 날개는 얇은 종이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산자락의 강물이 삼나무 가지 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은 빨갛게 익은 감에 저녁 해가 비치는데 그 빛은, 천장에서부터 길게 화로 위에 늘어뜨린 고리의 대나무통에까지 파고들 것 같았다.
-마른 콩깍지에서 팥이 작은 빛 알갱이처럼 튀어올랐다.
-저녁이 깊어지면서 잠자리들의 흐름도 다급하게 속력을 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 앞의 잠자리떼는 뭔가에 쫓기고 있는 듯 보인다. 날이 저물수록 거무스름해지는 삼나무 숲 빛깔에 제 모습이 사라질까 초조해 하는 것 같다.
-화물열차가 지나가 버리자, 눈가리개를 벗은 듯이 선로 저편의 메밀꽃이 선명하게 보였다. 붉은 줄기 끝에 가지런히 꽃을 피워 참으로 고요했다.
-단풍나무는 산에서 베어와 처마 끝까지 닿을 듯 높고, 현관이 환히 밝아질 만치 선명한 다홍빛에 이파리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컸다.
-국경의 산들은 적갈색으로 짙어져 석양을 받자 차가운 광물처럼 둔한 빛을 띠었다.
-적갈색 단풍이 날마다 짙어지는 먼 산은 첫눈으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엷게 눈을 인 삼나무 숲은, 삼나무 하나하나가 또렷이 드러나, 찌를 듯 하늘을 향한 채 눈 위에 서 있었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 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쳐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은하수는 두 사람이 달려온 뒤에서 앞으로 흘러내려 고마코의 얼굴이 은하수에 비추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콧날 모양도 분명치 않고 입술 빛깔도 지워져 있었다. 하늘을 가득 채워 가로지르는 빛의 층이 이렇게 어두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믿기지 않았다. 희미한 달밤보다 엷은 별빛인데도 그 어떤 보름달이 뜬 하늘보다 은하수는 환했고, 지상에 아무런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 흐릿한 빛속에 고마코의 얼굴이 낡은 가면처럼 떠올라, 여자 내음을 풍기는 것이 신기했다.
올려다 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고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은하수는 산능선이 끝나는 곳에 그 자락을 펼쳤다가 거기서 다시 거꾸로 화려하고 크게 하늘로 퍼져, 산은 한층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똥은 은하수 속으로 퍼져나가며 흩어져 시마무라는 또 한번 은하수 쪽으로 끌어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연기가 은하수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은하수가 쏴아 하고 흘러 내려왔다. 지붕을 비껴난 펌프의 물줄기 끝이 흔들려 물안개처럼 희뿌연 것도 은하수 빛이 비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발에 힘을 주어 올려다 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특히 시마무라가 요코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차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과 어스름이 내리는 바깥 풍경의 등불이 오버랩되는 장면을 기술하는 곳에 이르면 참으로 섬세하구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화재 때문에 요코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하늘에 보이는 은하수에 대한 묘사도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자연 풍경도 물론 포함해서―그냥 있는 그대로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와바다 야스나리처럼 느끼고 사유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줍니다. 저의 눈 앞에 창밖으로 보이는 3,40층은 족히 되어 보이는 HS라는 거대한 건물이 있습니다. 뒤에 배경으로 보이는 금정산의 검은 녹색의 능선이 건물의 허리를 횡으로 긋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 건물은 하늘과 금정산과 나지막하고 오밀조밀한 우리의 삶을 무례하게 짓밟고 우뚝 서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눈앞에 무언가 풍경에서 튀는 건물이 있구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한 번 더 사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자연 풍경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눈 앞의 광경을 다른 안목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