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믿을 것인가』

믿음에는 비약이 필요하다

by 현목

오랜만에 김형석 교수의 이름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때에 흔히 접했던 이른바 ‘인생론’의 수필로서는 김형석 교수와 안병욱 교수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들이 시대를 풍미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안병욱 교수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걸로 알고 있는데 김형석 교수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는 게 조금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지금 96세라고 하니 그것도 과한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당시 안병욱 교수는 주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사상을 전했던 걸로 기억이 나고 실제로 저의 고등학교에 오셔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김형석 교수는 착실한(?) 모범생 스타일로서 기독교적인 배경이 철저하게 보였습니다.


『어떻게 믿은 것인가』라는 책은 기독교 신자인 저로서는 책 제목만 봐도 흥미가 당겼습니다. 신자로서 언제나 관심이 가고 혹은 회의하기도 하고 자신이 없었던 부분들이 제목에 잘 나타나와 있었습니다.

그런 제목들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교회주의, 무교회주의, 그리스도인과 정치 활동, 헌금, 제사,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예정론, 명동 성당은 성역인가, 예수의 재림, 기적, 구원이란 무엇인가, 방언과 신유, 부흥회 등입니다. 이런 제목들은 평소에 목사님들의 생각과는 달라도 대놓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연히 김형석 교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대개는 신문 기사를 읽듯이 술술 넘어갔습니다. 어려운 신학적 설명이 없는 탓이기도 하고 대중에게 설명을 하려니 쉽게 접근하지 않았나 합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도 제가 그래도 관심이 갔던 몇 가지 부분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김교수는 장로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교회에 가서 강연을 할 때는 정식 강단이 아니라 아랫 강단에서 강론을 했다고 합니다. 김교수 자신은 그것마저도 감사해 하고 있지만 저는 평소에 그 점이 못마땅했습니다. 다 그런지는 몰라도 보수적인 교단은 여자 권사도, 여자 전도사도 정식 강단에는 못 올라가고 거의 장로 수준이 되어야 접근이 가능한 것을 봅니다. 저로서는 그런 것이 너무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논리가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그 수준으로 머무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정치 활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 교수의 전체적인 기조는 특히 성직자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정치 활동에 있어서 신앙과 교회를 정치의 수단으로 삼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다’라고 말합니다. 다면 김수환 추기경이나 김재준 목사 정도의 정부 비판은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기는 합니다.


같은 기독교 신자 혹은 목회자이라도 정치적인 이념에 있어서는 현실에서 편차가 너무 커서 어떤 때는 당혹할 때도 있습니다. 저들이 정말 내가 믿고 있는 예수를 같이 신앙하는 사람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로마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 말씀을 보면 바울은 세상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 때문입니다. 세상 권세는 법을 통하여 세상을 질서를 지키게 하는 것이 목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 권세가 독재라든지 백성이 보아서 패역할 때 신자가 과연 복종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는 현재의 교단을 보면 두 가지로 확연히 갈라지는 것을 봅니다. 이른바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서로의 견해가 다릅니다.


신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의 생각에 묻어가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교회로 간 것이 아니라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적어도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이 말씀한 것으로 보아서는 정치와 신앙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가 절제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 목사가 설교에서 이런 말을 하는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KBS가 광고를 하면서 시청료를 엄청 올린 것에 대해 신자라도 불복종 운동에 찬성해야 한다고, 심지어는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며 조공(朝貢)을 강요했던 모압 왕 에글론을 살해하고 모압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에훗 같은 저항 운동도 정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기도 합니다. 작금의 이슬람의 폭력은 우리가 보면 어처구니 없는 폭력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슬람 교리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쪽의 논리만 정당하고 저쪽은 무조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독선이 될 수도 있기에 여간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그 기준은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이기에 잘못하면 이현령 비현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헌금과 십일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김 교수는 십일조의 엄격한 해석에는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성서에 따른 근거도 없으며 신학적 정당성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보기에 천주교에서는 십일조를 요구하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김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구약시대에는 종교 세금이 지배층의 수입으로 되어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도 그 십일조의 혜택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민들이 정치가 부패하고 가난하게 되자 십일조를 안 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상황이 구약 말기인 말라기 시대에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잘 바쳐보아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너희 창고가 넘치도록 보답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미묘한 문제이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너무 적나라하게 말하면 서로 민망하게 되기 쉽습니다.


제사 문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도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죄가 아니다라는 식의 구속을 주기보다는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조상들의 선한 유지를 받아들이는 길인가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신앙이 생긴 후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 옳을 것이다.’


천주교는 제사에 대해서 좀더 포용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좀 더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바울이 제사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 가지고 시비가 붙었을 때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단 믿음이 일천한 신자들의 의심을 위해서는 자제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사를 지내냐 안 지내느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인사를 하면 악수를 하는 게 문화라면 이쪽의 문화는 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死者)에게는 두 번 하자고 약속한 것일 따름이 아닐까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제목에서 김 교수는 결론적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불교에는 불교의 구원관이 있고 이슬람교에는 그들의 구원관이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는 기독교 구원관이 있다. 다른 종교의 구원관이 다 우리 종교의 구원관과 같아져져야 한다는 것은 억지에 속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그들 종교 나름의 구원관이 있느냐를 묻는 질문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본 구원이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 김 교수는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핀트가 어긋난 대답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크리스마스나 석가탄생일에 스님이 성당에 가고 신부가 절에 가서 축하해주는 것을 보면서 구태어 저렇게까지 할 것은 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서로 적대할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공개적으로 저런 행사를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적어도 천주교 입장에서는―부인하는 행동이 아닐까요.


김 교수는 기독교는 기독교의 구원관이 있으나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다른 종교인들과도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데 공동의 화합을 깨게 된다, 따라서 구태어 그런 문제를 꺼내지 말고 침묵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가 소개한 감리교 신학대학 B학장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종교를 폄하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인간이 생각해 낸 하나의 방법론이라는 걸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착하게 살자는 것이 목적이라면 구태어 기독교 신자이어야만 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신자이어도 좋습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화이고 비유와 은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기초하여야 하므로 궁극적으로 구원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다다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의 재림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반적 신자는 막연히 오랜 세월이 지나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정도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일반의 이런 생각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현대의 신학자들이나 기독교 사상가들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은 예수의 인격적 재림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의 재림은 앞으로 올 것이나 미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개인과 역사의 현재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적에 관한 문제‘라는 제목에서 김 교수는 의외로 예수 시대의 기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이 기적을 체험한 것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독교가 출발할 때는 기적과 복음의 두 길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적은 역사와 더불어 약화되었고, 복음이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쨌든 기적과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두 기둥이 되었다.‘


기적에 관해선 저는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는 오락가락하는 심정입니다. 주위에서 기적 같이 병고침을 받았다고 하니 그런갑다 하지만 실제로 제가 체험을 한 것도 아니고 본 것도 아니니까 언제나 어정쩡합니다. 성경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다고 하니 믿지만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나 하고 자문하면 더 혼란에 빠집니다. 떡과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나, 아니면 가만히 있는데 제자들의 손에 그저 주어진 것인지, 땅에서 샘물 솟듯이 올라온 것인지 구체적인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반 신자에게 교회 다니는 것은 죽어서 구원받기 위해서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항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설교 시간에 윽박지르듯이 말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영원히 지옥에 보낸다는 게 정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듭니다. 부족한 인간도 사형제도를 없애겠다고 난리인데 하나님께서 일시적이 아니고 영원히 인간을 유황불이 훨훨 타는 지옥에 보낸다? 조금은 믿어지지 않은 게 사실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일반적인 신자들이 갖는 구원관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짐작하기에는 신학자나 목사들도 지금은 그런 쑥스러운 천당이나 지옥 같은 문제는 꺼내지 않는 것 같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이 있다면 그것은 곧 구원일 거라는 공통성을 추구해 왔다. 구원은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고 믿음은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은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현재의 신체적 영생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부활할 수 있거나 영적 실체의 영존이 가능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하나님의 실재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이 은총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고 있다는 삶)을 믿고 체험하는 사람은 천국이나 지옥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신체적인 죽음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사랑의 사실이 성취되고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말 중요한데, 김 교수의 말은 천국, 지옥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없고, 하나님, 예수님, 성령에 동참하여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우리는 성경의 기록이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비유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고 또 각 종교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 무한성을 가지기 위해 지어낸 픽션에 불과하게 됩니다. 딜레마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방언과 신유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만나는 현상입니다. 김 교수는 모든 종교는 미신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으로 봅니다.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기보다는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방언은 기독교에만 있는 현상도 아니라고 합니다. 신유는 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너무 목을 매어 달리는 것도 보기에 그렇습니다. 이것도 절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 책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러한 실정(당시에 66권에 해당되는 것들이 따로따로 전해져 읽히고 있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성경‘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어 있지 않았다)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66권의 성경 속에서도 부분적으로 비판해야 하는 내용이 있다고 보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경의 권위와 신앙의 전통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을 구구절절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견해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을 지나치게 역사적 사료나 철학적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소망스럽지 못하나 한 마디 한 마디에 개념적 해석을 내리는 것도 지나친 의도인 것 같다.‘


저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무오류설이나 축자영감설은 무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흥회에 대한 얘기가 되겠습니다. ‘부흥 운동에는 좋은 점도 있었으나 어려운 문제도 없지 않았다. 대개의 부흥 목사들이 감정적이며 즉흥적인 설교와 집회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지적 수순이 높은 교유들이 멀리하는 경향이 생겼는가 하면 지나치게 교세 확장과 헌금 위주의 집회가 되어 건전한 목회자나 교우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부흥회하면 저의 기억에 떠오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찬송가를 수도 없이 불러서 신자들의 감정을 조금 고무시켜 놓습니다. 그러고는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게 해서는 선동적인 언사를 구사합니다. 지금은 그런 경향이 많이 없어졌지만 신자들에게 말을 하대하며 초등학생 취급을 하는 것을 봅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게 바람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저로는 부흥회에서 소위 은혜를 받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될 수 있으면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김 교수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서 문제 제기한 것들은 대부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번쯤은 고민해봤음직한 것들입니다. 개중에는 수긍이 가는 것도 많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 김 교수가 주장하는 대로 동의를 하면 기독교 신앙 자체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믿음과 순종이 근본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지 죽는 날까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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