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시죠?』 랄프 스쿠반

'경계 위의 인간'의 존엄성

by 현목

요양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한지 이제 일년 반쯤 되었습니다. 요양병원은 기본적으로 치매 환자에다가 노령으로 얻지 않을 수 없는 당뇨, 고혈압, 뇌졸중을 콤바인된 양상을 보입니다. 의사로서 요양병원이 있다는 소문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제 앞에서 대하고 보니 결코 저와는 별개의 세계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떤 면에서는 착잡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경험한 치매 환자 하나 하나 개인에 대해 증례보고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자신의 감상을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1965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지금은 쉰한 살이고 이 책이 독일에서 출간된 것이 2014년이니까 당시에는 마흔아홉 살이었습니다. 우연히 젊어서부터 요양원에 인연이 닿아서 일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요양원원장까지 맡았는데 이 책을 출간할 즈음에는 25년간이나 종사한 요양원을 그만둔다고 하니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의 경력이 정치학 박사인데 요양원 일을 하면서 그런 학위가 필요한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요양원에 필요한 지식을 쌓는 게 순리인가 싶은데 그 속내는 알 수는 없겠습니다.


요양원의 환경이 좋지 않다고 불평(?) 같은 얘기를 전개하는 것이 저에게는 의외였습니다. 저자가 운영하는 요양원은 환자가 35명쯤 되고 하루에 드는 경비가 환자 한 명당 100유로(우리돈으로 13만원 정도)라고 하는데 그것도 적어서 힘들다고 합니다. 또 자격을 가진 전문 인력을 의무적으로 할당 비율이 있어서 고용해야 하는데 저자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실제로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일을 잘하는 보조 인력이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저자의 애로를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당국에서는 어떤 기준을 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고충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갓 졸업한 의대생보다 돌팔이를 고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요양원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나쁘고 또한 당국의 요양원에 대한 감독에 대해서도 저자는 별로 좋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또 놀란 것은, 우리는 대개 서양 사람이라면 개인주의가 발달해서 출가하면 부모 자식이 따로 살며 각자 도생하는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한 치매에 걸린 부모를 자기들이 돌보지 못하고 요양원에 맡기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을 보고는 사람이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같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양병원 혹은 요양원에 가면 제일 먼저 안개처럼 휘감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안개일 것입니다. 대부분 나이가 80을 넘고 90을 왔다갔다 하니까 분위기 자체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누구나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자가 가끔 “이래 살아서 뭐하노. 빨리 죽어야재”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생명이 위급할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는 것이고 눈 앞에 보이는 죽음의 저편 너머에 대한 공포가 서서히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저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고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철학이나 학문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류 5천 년 역사 이래 제기되어온 문제이고 과거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인간에게는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풀기 위해서 인간들은 종교라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치매 환자―주로 알츠하이머 병에서의 치매―는 치매가 깊을수록 당사자는 즐겁다고 합니다. 비록 가족은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가 인지기능을 잃어버리고 성격이 변하여 마음이 아프고 게다가 경제적인 부담까지 져야 되는 고통에 시달리지만 말입니다.


치매 환자가 왜 즐거운지 그 정신 작동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정신에는 네 가지의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각과 이성입니다. 이 두 가지의 측면은 우리가 인간의 특성을 정의할 때 바로 이 항목을 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치매 환자는 생각과 이성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차원의 정신으로는 감정과 느낌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건강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정신이지만 치매 환자는 느낄 수는 있어도 건강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신의 세 번째 차원으로는 자아, 그러니까 ‘나답다’라는 감정을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개체이고 나에게는 다른 사람과 달리 따라붙는 게 있습니다. 이름, 직업, 지위, 돈. 인간관계, 자동차, 집, 가족…. 치매 환자는 이것이 거의 통째로 사라집니다. 나라는 개념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주위 사람에게는 고통스럽지만 당사자는 내면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저자는 축복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의 차원의 정신으로는 인간의 영적 차원을 말합니다. 인간 정신의 정수이며 인간만이 가지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치매 환자가 오히려 이런 네 번째 차원의 정신을 비추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치매 환자는 기억력과 인지기능의 상실로 인해 이성과 생각을 상실했고 감정의 반응도 건강한 사람과는 다르고 또한 자아를 잃어버렸으므로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어쩌면 순전한 영적인 정신의 차원을 이루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치매환자는―다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해 했고, 그들은 언제나 웃었고, 유쾌했고, 여유로웠고, 느긋했고, 만족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치매가 반드시 불행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경계 위의 인간을 정의합니다. 그 예로 게르버 부인을 들고 있습니다. 그녀는 뇌출혈로 인해 의식은 혼수상태이고 기관절개를 하여 호흡하고 있으며 복벽을 통해 장으로 연결된 고무관을 통해 유동식이 공급되고 있다. 이른바 ‘식물인간’의 상태인 셈입니다. 그녀의 특성을 들면 이렇습니다.

ㆍ그녀는 자기 몸의 모든 실질적 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ㆍ그녀는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나는’이라는 의식이 있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ㆍ꿈을 꾸기라도 했을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ㆍ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보고, 듣고 알아차린다는 감각은 상실했으며 감각 능력은 극단 적으로 축소됐다.

ㆍ‘이해한다’라는 문장은 더 이상 그녀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ㆍ기억이란 우리를 역사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ㆍ그녀는 어떤 미래도 계획할 수 없었다.

ㆍ그녀는 더 이상 누구와 소통하거나 자기 입장을 밝히거나 어떤 것에 관심을 표명할 수 없었다.

ㆍ그녀에게는 모든 행위가 봉쇄됐다

ㆍ게다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를 ‘경계 위의 인간’이라고 저자는 불렀습니다. 제가 요양병원에 근무하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경계 위의 인간’ 혹은 그 부근의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당사자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의식이 우리 정상 사람과는 다릅니다. 가족이야 이제까지 몇십 년을 살아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 운운하기 전에 사랑으로,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타인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저자는 그에 대해서 어떤 논리를 제공합니다.


철학도, 고대 그리스인들도, 중세의 기독교도, 근대인들도 이른바 ‘경계 위의 인간’에 대해서 정의한 적이 없다고 저자는 먼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어 동물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밝히고 있지만 ‘경계 위의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거의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선 ‘경계 위의 인간’의 특성을 네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를 가졌다는 것 둘째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셋째 고통을 느끼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에 유한성을 말합니다. 사실 이것들은 딱히 ‘경계 위의 인간’만의 특성은 아닙니다. 정상 인간이라면 여기에 사물을 판별하는 이성이 더 추가가 되겠지요.


인간은 육체를 가짐으로써 내가 존재합니다. 게르버 부인이 비록 망가졌다고는 할지라도 육체 속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내’가 육체를 떠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인간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성을 가진다는 것, 관계성이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따라서 경계 위의 인간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 됩니다. 저자는 자기가 경험한 바로는 ‘경계 위의 인간’도 물론 고통을 느낀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사람이야말로 자기 상태를 말할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우리의 도움, 함께 있어주기, 동정심,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다’라고 ‘경계 위의 인간’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모두가 유한성을 가집니다.


‘경계 위의 인간들―다른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하며 존엄을 잃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몸을 입고 있다는 것과 유한한 존재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너무 명확한 사실이어서 부연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우리 행동이 자주 시험에 들게 되는 분야는 도움에 대한 필요와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능력, 이 두 가지 분야다. 다른 이가 우리의 도움에 의지하고자 하는 도움에 대한 욕구는 우리가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필요성, 나아가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이런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고통을 느끼는 능력은 우리의 도움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치매에 대한 책들은 많이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가 쓴 책을 보면 대개 치매에 대한 정의, 치료, 예방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의료인이 아니면서 25년간 치매 환자와 같이 생활하면서―‘경계 위의 인간’도 포함해서―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회의와 건강한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 것이며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한 인간으로써의 존엄을 지켜주어야 하는 문제를 ‘사랑으로, 공감과 용서와 선의‘로 이야기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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