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과 발견
‘손바닥‘ 수필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의아하였습니다. 왜 하필 ’손바닥‘이지? 손바닥에 대한 수필을 썼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책을 읽어보고 나중에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소설 중에 장편(掌篇)소설이 있습니다. 초단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편소설처럼 도입-전개-위기-절정-대단원의 구조가 아니라 도입, 전개를 빼고 소설을 구성한 아주 짧은 소설입니다. A4용지 두 장 정도의 분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수필도 즉 손바닥 장(掌)자의 장편(掌篇)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책에는 손바닥 만한 수필들이 꽤 있습니다.
웬만한 수필가의 수필을 읽으면 이 정도의 수필은 나도 쓸 수는 있겠다는 시건방진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는 아, 나는 안 되겠다라는 포기의 한숨 소리가 따라 나오고 털썩 주저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책의 수필의 방향이야말로 제가 그토록 추구해왔던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능력이 없어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제 상상으로는 최민자 작가는 그냥 술술 이런 식의 글을 썼을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쓰려면 전체를 다시 고쳐쓰기를 해도 최민자 작가의 수준에 도달할지 의문이 듭니다. 그만큼 이분의 필력은 후천적 노력보다는 선천적 재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필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습니다. 수필보다는 개인적으로 시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눈은 높아도 손은 못 따라가는 주제에 하느라고 했지만 별로 소득이 없는 셈이었습니다. 수필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얻는 깨달음, 관점을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별하면 서정적 수필이 있고 논리적 수필이 있습니다. 최민자 작가는 굳이 구별하자면 서정적 수필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보통의 여성 작가들과 같은 여성성이 유별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여성성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성이라 하면 여성 특유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동성, 감수성, 유약함, 상냥함, 따뜻함, 조용함 등이 있습니다. 『손바닥 수필』에서 오는 분위기는 남성처럼 전투적이고 씩씩함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인 느낌이었습니다.
둘째는―여기가 가장 최민자 작가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은유의 구사가 활달하고 거침이 없고, 상상의 비약이 탁월하였습니다. 『손바닥 수필』의 많은 글들이 조금만 문장들을 정리하여 추려내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산문시였습니다. 예를 들면 「거미」 같은 수필이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적 역량이 충분한 분이 왜 시를 쓰지 않는지 하는 의아심이 든 것은 사실입니다.
은유의 예는 이 책에서 무수하지만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 「사라진 것들의 마지막 처소」에 나오는 것들만 추려보아도 은유의 풍성함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노래방은 집단 해우소다. 짓눌린 그리움이 통절한 가락으로 뽑혀 나오고 잊었던 신명이 토막난 춤사위로 흩뿌려진다. 잠자리처럼 허공을 선회하던 음표들은 천둥번개 속을 부유하다가 흥성거리는 어깨 위에 얹혀 진즉 신호등을 건넜을 것이다. 날 밝기 전, 교회를 떠나간 종소리들은 해질녁이면 슬그머니 종루 안으로 기어들곤 했다. 저녁답의 종은 더 길게 울었다. 떠나간 것들이 다 돌아와 숨는, 사람의 안뜰이 가장 넓은 우주다.‘
「길」이란 지극히 평범한 제목으로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길이 바다에서 부화하여 태어납니다. 유충들이 발버둥치다가 튕겨올라 송림 사이로 사라지면서 길이 됩니다. 이 길은 인간의 발꿈치에서 세를 불리고 산허리를 돌아 봉우리를 삼키고 집과 사람을 뱉어내는 거대한 파충류가 됩니다. 바람을 데리고 재를 넘고 달빛과 더불어 물을 건너는 길은 때로는 외로움을 타기도 합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마침내 길은 입성합니다. 도시의 마성에 길들은 또한 수난을 면치 못합니다. 유연성을 잃고 뒤틀려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파고들기도 합니다. 대도시 인간에서 비대해진 길은 동맥경화에 걸려 벌레에 뜯어먹힙니다. 길은 변두리를 비실거리다가 일생을 마감합니다. 길들은 도시에 와서 죽습니다. 승천하는 길을 위한 전등 하나가 하늘가 별자리로 나지막이 걸려 있습니다.‘ 길의 일생에 대한 상상력과 거침없고 활달한 필력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구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시간과 바다에서 태어난 길이 산과 물을 돌아 도시로 오기까지의 공간의 스케일은 장대합니다. 모르긴 해도 「길」은 이책의 백미(白眉)가 아닌가 싶습니다.
셋째는, 책의 제목처럼 장편(掌篇) 수필이 많았습니다. 글의 분량이야 심하면 경구적(驚句的)으로 쓸 수도 있는 것이어서 시비거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타가 인정하는 대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다른 수필 책은 어떨지 몰라도 역시 호흡이 짧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책에서 요즘 유명한 수필가는 최민자라는 걸 읽었습니다. 호기심에서 ’예스24‘에서 검색해 보고는 4개월 전에 『손바닥 수필』을 주문했습니다. 쳐박아 두고 있다가 우연히 손에 잡혀 읽어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앗!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제가 그토록 써보고 싶었던 수필의 전범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다 통독하고 난 후에 제가 ’이야기 산문시‘라고 쓰고 있던 「봄비 이야기」의 글들을 다시 고쳐쓰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이제껏 두 작품을 수정을 했습니다. 만약 제가 소기의 결과를 얻는다면 제게는 이 『손바닥 수필』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최민자라는 작가도 뵌 적이 없어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제 글쓰기의 은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