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정주영

‘신호를 차단하고 깊이 몰입하라’

by 현목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다가 ‘신호를 차단하고’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 보였습니다.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요즘 제가 고민하는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요즘 무언가 집중하려고 해도 너무나 많은 정보 때문에 여의치가 않습니다. 아이폰을 만지작거리고 유튜브로 이것저것 뒤지다 보면 두세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리고 막상 제가 할 일을 하려고 하면 진이 빠져 내팽개쳐버립니다. 그제서야 후회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자는 생각과 동시에 주저함도 있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자기계발(자기의 슬기나 재능, 사상 따위를 일깨워 줌)서란 대부분 읽었을 때는 금방 자신도 무언가 이룰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대부분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십상(十常)입니다. 그래도 혹시 거기서 뭔가를 건진다면 만몇천 원이 문제일까 싶어 사버렸습니다.


다 읽고 나니 제가 착각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신호란 ‘긍정적’ 혹은 ‘부정적’ 신호였습니다. 말하자면 부정적 신호를 차단하고 긍정적 신호를 가지고 한 가지 주제에 깊이 몰입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골자였습니다.


‘긍정적 신호’란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우려먹은 주제이기도 합니다. 저도 옛날에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노만 빈센트 필의 ‘긍정적 사고’, 마틴 셀리만의 ‘긍정적 심리학’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또 흔히들 아이들에게 격려하는 의미로 이런 말을 되뇌어 보라고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이게 다 같은 얘기입니다.


부정적 신호를 버리고 긍정적 신호를 바라보고 한 가지 주제만을 성공한 사람들, 다시 말해 키신저, 퀴리, 세잔, 카라얀, ……, 이런 사람들을 봐라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라. 에드먼드 힐러리, 라인홀트 메스너, 고상돈, 허영호, 엄홍길도 성공했다, 그러니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집중하면 너도 못할 것도 없다는 식의 논리 전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몇 사람의 성공한 증례를 가지고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면 너무 소극적인 생각일까요.


저자는 이 책을 쓰는데 10년간 걸렸다고 하니 그 노력에 대해 가상하다고 생각은 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증례보고(case reprot)처럼 ‘신호를 차단하고 깊이 몰입’에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서 얘기를 하게 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생각은 별로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의학을 전공했습니다만 의학논문 잡지에도 증례보고가 실립니다만 그것은 본격적인 논문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결코 이 책이 읽는 사람에게 해로움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그 책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내어 응용한다면 얼마든지 긍정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왜 긍정적 신호를 지속적으로 가지지 못하는지, 왜 하나의 주제에 몰입 못하는지, 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유와 극복할 수 있는 조언을 주었으면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출판한지 3년이 못되어 35쇄를 찍었다니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만 ‘신호를 차단하고 깊이 몰입하라’는 단순한 주제에 너무 많은 증례들을 동원하다 보니 분명히 안에 맛있는 과자가 두 개 있기는 한데 포장이 과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독후감하고는 거리가 먼 대목인데 제 기억에 너무 남아서 기록해 둡니다.


졸라는 자신의 책이 나올 때마다 친구인 그에게 선물했다. 이번에도 이 책을 보냈다. 분노와 모욕감에 사로잡힌 그는 졸라에게 아주 짧은 편지를 한 통 보냈다.

“그대가 보내준 『작품』을 보았네. 루공 마카르 총서로 성공하신 저자가 나를 기억해서 주인공으로 기록해준 것에 감사할 뿐이네. 실패한 세월도 지나갔고, 마지막 악수를 이 편지로 청하는 바네.”

소설 속 주인공으로 자신을 ’기록해준 것에 감사하다‘는 말에 그의 모든 분노가 정제되어 담겨 있었다. 그는 그 뒤로 한평생 졸라를 보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폴 세잔입니다. 에밀 졸라는 폴 세잔과 친구인데도 『작품』이라는 소설을 발간하면서 세잔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무능하고 실패한 화가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세잔의 분노의 표출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라면 이랬을 것 같습니다.

“야, 이 새끼야 그러고도 니가 내 친구냐. 개새끼, 너하고는 다시 상종하나 봐라.”

세잔의 태도가 바로 교양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