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평화, 행복‘
옛날부터 막연히 서양의 수도원의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였습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사찰의 스님들의 생활과 비슷하지 않나 상상만 하였습니다. 이 책은 1957년(저자 나이 42세 때)에 원작이 나왔고 우리나라 번역본은 2014년입니다. 그러고 보면 64년이란 세월이 흘러 시대 감각이 맞을까 하는 기우(杞憂)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저자인 패트릭 리 퍼머의 성격입니다. 수도원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인물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서머싯 모음은 그를 ‘상류층 여성들을 상대하는 제비’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옮긴이도 말미에 ‘이 책을 출간 후로도 패트릭 리 퍼머는 여전히 술과 담배, 춤과 노래, 여자와 모험을 즐겼고’라고 언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원 생활의 본질을 잘 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퍼머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 된 베네딕토 수도원인 생 방 드리유 드 퐁트넬 대수도원, 솔렘 대수도원과 라 그랑 트라프 대수도원, 마지막으로 카파도키아의 바위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겪은 경험담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생 방 드리유 드 퐁트넬 대수도원과 라 그랑 트라프 대수도원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트라프 수도원의 수도자들의 생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혹독합니다. 길지만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원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자의 기상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새벽 1시 아니면 2시다. 성당에서 전례를 행하거나 무릎을 꿇거나 선 채로 침묵의 명상을 하는데 하루에 7시간을 쓴다. 전례는 어둠 속에서 진행될 때가 많다. 남은 시간에는 가장 원시적이고 힘겨운 형태의 들일을 하고,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리거나 순교자 열전을 읽으며 보낸다. 여가나 기분전환은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고,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학습에 몰두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빠듯하다. 식단은 거의 전적으로 근채류로 이뤄진다. 고기와 달걀, 생선은 금지된다. 이 검소한 식 단으로도 모자라 1년에 6개월 동안 엄격한 단식 규칙이 적용된다. 수사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늘 똑같은 무거운 옷을 입는데, 한여름에 거친 일을 할 때는 차마 못 견딜 지경이다. .. 이곳에는 독방이 없다. .. 난방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아서 수사들은 수도복을 입고 두건을 쓴 채로 잠든다.
왜 그들은 그러한 생활을 기꺼이 할까요? 우리 같은 세속적인 인간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출세하고 호의호식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까요.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들은 무엇에 꽂혀서 세속을 버리고 어쩌면 황량하다고 할 수도원으로 향해 평생 고난의 길(정신적으로는 또 다른 의미의 행복이라는 보상을 받았겠지만)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걸까요.
한 시토회 수도자 작가는 그 이유를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모든 세속적인 소유물과 허영심, 야심을 물리침으로써, 또 개인적인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열망’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이기도 합니다만, ‘자신들의 기도와 고행이 영혼을 구제하고 인류의 죄를 덜어주는 속죄와 치유’를 이룬다는 것과 셋째는 자신들의 ‘이런 희생의 삶이 신에게 봉헌된다는 믿음’입니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자의 생활은 통상적인 수도자들 모두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생 방 드리유 대수도원의 아빠스(라틴어로 대수도원의 원장을 부르는 칭호이자 직함)는 트라피스트회는 특별한 경우이고 드물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수도원이든 수도자는 세 가지 서원을 한다고 합니다. ‘청빈, 정결, 순명’입니다. 청빈이야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왔으니 그곳에서 치부를 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수도원에서 개인생활이 아닌 단체생활을 하려고 왔으니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순명 또한 마땅히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런 단순한 차원만이 아닌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인생의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순명하겠다는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먹었다고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고통과 고뇌의 밤을 거쳐야 순명이라는 득도의 길에 다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정결(淨潔)입니다. 수도사를 우리 같은 세속적인 사람이 보면 분명히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고상(高尙)’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동물성에 기초한 인간입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번식이라는 육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성적 망상에 시달립니다. 물론 그들은 기도와 정신적인 비상을 통해 극복해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스러운 수도자라도 그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결의 서원은 평생에 걸친 가장 혹독한 서원이지 않을까 하고 퍼머는 말합니다.
성 바실리오(329-379)가 자기 수도원의 분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가 ’빛, 평화, 행복‘이었다고 합니다. 빛은 밝고 가볍고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빛은 신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명예와 부와 가족과 건강까지도 포기하고 오직 빛에 집중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신의 뜻으로 수용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인과율을 넘어서 초월적 예지계로 가겠다는 결심입니다. 단지 마음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자들의 침묵과 기도와 고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머나먼 길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마저 ’손쉬운 변신‘이고 마지막 단계는 ’그저 사소한 통과의례일 뿐‘인 경지까지 갑니다.
그래서 그들이 얻을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평화로 연결됩니다. 세속에서 살든, 수도원에서 살든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평화를 원하고 그것은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행복으로 연결되길 희망합니다. 단지 세속의 우리 같은 사람은 부와 권력과 건강을 통해서 그것을 얻으려고 하고 수도사는 그것을 끊어버리고 신에의 집중과 흠숭을 통하여 도달하려는 차이일 뿐입니다.
자연계의 인과율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인 지성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세상의 모순과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만이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을 위해 칸트는 신을 ’요청‘하였습니다. 요청이라는 점에서 칸트와 비슷할지도 모르나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을 통해 칸트와는 달리 신을 사라져야 할 망상(delusion)으로 비하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절대적 신의 존재를 주장합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자신이 판단해야 할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빛과 평화와 행복을 위해는 자연계의 인과율을 초월하는 예지계로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의 생활에서 가장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침묵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묵하면 불교의 묵언수행이 떠오릅니다. 왜 그토록 침묵을 강조하고 심지어는 강요할까요. 침묵은 우선 당사자의 말이 없어야 합니다. 또 침묵은 정적, 고요함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인공의 소리가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 깊은 숲속입니다. 그곳은 자연의 소리만 들리고 침묵하는 당사자의 소리뿐입니다. 발가벗은 자신이 안팎으로 차단된 침묵 속에서 드러납니다. 허황된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진정 인간에게 필요한 본질만이 들립니다. 그것은 단 한번 뿐인 인생에서 깨달음으로 연결됩니다.
모두가 수도자가 될 수 없다면 숲속에서 생활할 수도 없습니다. 번잡한 일상에서도 침묵하는 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침묵을 방해하는 것은 너무 시끄러운 인간관계와 티비 시청, 유튜브들일 것 같습니다. 안과 전문의이고 기독교를 믿는 제 친구가 요코하마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데 연락을 하려고 이메일 주소를 물으니 없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수기의 편지로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 사용을 버렸습니다. 아마도 제 추측컨대는 유튜브도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수도자처럼 고요한 숲속에서 살 수 없다면 일상에서도 침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말이면 될 수 있으면 근처 산에라도 거서 침묵하기 위해 걸어봅니다. 누군가 요즘 ’지겹도록‘ 유행하는 트로트를 틀고 옆을 지나갑니다. ’침묵을 위한 시간’을 내려고 일부로 이 산을 온 것은 아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