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법』가와키타 요시노리

행복은 먼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의 자신의 삶의 현장에 있다

by 현목

이 책은 원본이 1995년에 일본에서 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1997년에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원저자는 기자 출신으로 신문사를 나온 후에는 언론 등에 기고를 한 모양입니다. 저도 오래 전에 구입하고 보고 있지도 않다가 우연히 제목에 끌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중도에 몇 번이나 그만 읽으려고 했습니다. 대부분이 상식적인 혹은 그보다 약간 깊은 얘기들이라서 별 맛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군데는 인상에 남아서 끝까지 읽기는 했습니다.


세상살이 하면서 이것저것 걸리는 일에 대한 100가지의 짧은 단상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 중에서 제게 여운을 남기는 곳 몇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6. 오래 살려고 하지 말고 우선 현재를 즐긴다

오래 사는 비결은 간단하다. 배는 80퍼센트만 채우고, 몸을 움직이며,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은 현재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를 즐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즐 길 수 없게 된다. ‘먼 장래로 먼저 즐거움을 가지고 간다’고 하지만, 그 먼 장래란 언제인 가? 언제가 먼 장래라면 영원히 그 시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장수 비결은 소식(小食)하고 운동하고 마음을 평안히 가지라고 하는,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음의 평안을 위해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련을 하며 일생을 마감합니다.


저자는 ‘근심걱정하지 않는다’라고 간단히 말해 버리지만 한평생 살면서 그게 어디 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입니까. 건강이 무너질 수도 있고, 뜻밖의 이별이 생기고, 벼라별 일이 다 생기는데 그걸 초연히 맞이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려는 정도일 뿐입니다.


‘현재를 즐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즐길 수 없게 된다.’ 이 말은 제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현재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지 않는다.’ 저는 이제껏 살면서 자신을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도 거의 없는 듯합니다. 행복은 제가 노력하면 먼 미래 어느 날에 도래할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생각을 고쳐야 하지 않나 하고 요즘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현재 행복하다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마치 적금 붓듯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생을 마감하는 날 “내 인생은 행복했구나”라고 통장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치 칸트가 죽음을 앞두고 포도주 한 모금 마시고 “Est is gut.”라고 말했듯이 말입니다.

22. 행복은 이미 손 안에 있다

문제는 행복의 내용이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하는 일이 잘 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부자가 되는 것, 지위나 명예를 얻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좋다 치고, 그것과는 별도로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현재의 상황이 어떤 상태이든 간에 ‘지금 나는 불행하다’는 감각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면, 설령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한 상태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 기쁨은 잠시일 뿐, 또다시 새롭게 불행한 심정을 틀림없이 안게 될 것이다.

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가 쓴 동화극 『파랑새』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에 가서 잡아오는 게 아니고, 이미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제각기 현재의 상태 그대로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이다. 만일 현재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는 행복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 그러한 상태를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마음이 평온할 때이다. “행복한 생활은 마음이 평화로울 때 성립한다”고 키케로는 말했거니와, 마음이 평화로우면 사형수라 하더라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인용이 길어졌습니다만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요는 행복은 먼 미래에서 찾지 말고 현재의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 요체는 마음의 평정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그다지 풍파가 없다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될지 몰라도 인생에는 항시 어려움이 닥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봐야 하고, 암 선고가 내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건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훈수를 둘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겪어가면서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극적이나마 제 생각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감각으로 연결시키는 연습을 좀 더 적극적으로 평소에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의 가톨릭 수도사의 생활을 결국 ‘빛과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패트릭 리 퍼머는 『침묵을 위한 시간』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흠숭과 순명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곧 행복인 것입니다.

62. 크고 중요한 일일수록 결과를 하늘에 맡긴다

한 가지는 집념이다. 이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 동시에 집념에 매달리지 말고 ‘될 대로 되라’는 대담성이다. 상반된 두 가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결과를 하늘에 맡기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받아들인다는 각오의 차이이다. 최선도 받아들이고 최악도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인다는 긍정적인 자세가 행운을 가져온다.

요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를 말합니다. 문제는 진인사와 대천명의 경계를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오디션을 봤는데 수백 번을 보고 합격을 했다고 하면 “그것 봐라. 집념을 가지고 끝까지 가니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느냐. 최후까지 포기하면 안 돼.”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수백 번 오디션을 보고도 실패를 계속하면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결과를 하늘에 맡겨야지 과도한 집념은 불행할 뿐이다.”라고 정반대의 소리를 합니다. 어느 것이 맞다는 것입니까. 대부분은 결과를 보고 뒤돌아 보고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요즈음은 칠전팔기(七顚八起)는 옛말이 된 것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가지려고 하면 결국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64 품성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라

품성이라는 것은 평소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개 마지막 판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품성을 꿰뚫어 보는 눈이다. 어떻게 해야 품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그 기회가 오느냐 안 오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 개인이든 조직이든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돈이거나 사회적 지위거나 세상 사람들의 평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 자기 정당화 같은 것이라면 그 사람의 품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봐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반대로 신뢰, 명예, 긍지, 동정 같은 것이라면 품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품성은 사전적으로는 ‘사물이 지닌 고상하고 격이 높은 성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 정신을 다섯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감성과 상상력 그리고 이론 이성의 지성과 실천 이성에 의한 도덕법칙과 반성적 이성에 의한 미적 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품격이란 이 중에 실천 이성에 의한 도덕법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성품이 얼마나 도덕적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품이 고상하느냐 저질이냐 결정되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위증을 하면 자신이 살고 상대가 죽고, 자신이 진실을 말하면 자신이 죽고 상대방이 산다면 이럴 때 후자를 택하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도덕적이냐 아니냐를 쉽게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자신이 손해를 볼 때 그것을 무릅쓰고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들의 세계는 특히 같은 과이면 거의 스승과 도제(徒弟)의 관계입니다. 상하관계가 거의 군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수련을 받을 때는 수술실에서 ‘조인트’ 까이면서 배웠습니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도 대학이 다르면 의사들은 별로 선후배의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저 자신의 품성이 낮지 않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는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젊은 의사가 당직을 하다가 본 저의 환자가 처음에는 별 일이 없었는데 나중에 일이 생겨서―발견이 조금 늦었을 뿐 그렇다고 나중에 생명에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결과적으로는 수술을 조금 늦게 하게 되어 보호자가 의료소송을 한다고 야단을 떨었습니다.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기도 거북살스럽지만, 젊은 의사와 진료기록부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다가 저도 모르게 의식을 하지 않았는데 손을 앞으로 내밀게 되었습니다. 순간 상대방은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듯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든 빌미를 준 것이 저이니 할 말은 없었으나 자식 같은 나이의 젊은이로부터 그런 일을 당하자 유구무언으로 물러나왔습니다. 결국 저는 금전적으로 손해를 볼까 봐 의연히 대처하지 못하고 저질의 품성을 적나라하게 보인 꼴이 된 셈이었습니다. 인간의 품성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의 순간에 어떤 행동을 나타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중에 환자 보호자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사죄를 하고 일단락된 에피소드입니다만 저로서는 언제나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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