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낯설게 하기’를 영어로 찾아보니 defamiliarization으로 되어 있고 한문으로는 이화(異化)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familiarization은 친숙함을 뜻합니다. 우리의 친숙한, 자동화된 인식을 깨고 우리가 평상시에 생각하지 않은 관점을 제시함으로 사물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 대 말에 걸쳐 러시아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러시아의 문학이론가인 빅토르 시클롭스키에 의해 개념화되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 용어는 어떤 면에서는 진부하기도 합니다. 또 이 용어는 문학 특히 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 걸쳐서 다 유효한 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제가 받아보는 국민일보의 문화면에 시인 소개하는 난에 이원이란 시인의 작품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그 글 첫 문장―‘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날 밤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다’―을 읽으면서 제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가 이 ‘낯설게 하기’였습니다.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날 밤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다. 두 다리는 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길이 확인시켜 준 다음날부터 꿈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꿈의
뿌리는 몸에 있고 몸의 뿌리는 꿈에 있다는 사실을 다리가 말한 다음날부터
먼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나다. 세계는 푸르거나
검다는 것을 인정한 다음날 아침 신발을 신었다”(‘실크로드’ 부분)
뿌리가 없다니 무슨 말이지, 왜 그 사실을 인정한 날 밤부터 잠이 오기 시작했단 말인가? 저는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시인은 그것만 해도 일단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낯설게 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래적으로 이걸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랄까 타고 났다고나 할까요. 저 같은 경우는 그게 잘 안 됩니다. 포엠포피아에서 한창 공부하던 시절인 2006년 경에는 무슨 인연이었던지 송재학 시인의 시집 여섯 권을―절판된 것은 서울 중앙도서관에 가서 복사를 해 가지고―전부 키보드로 두드려 필사하고 오규원 시인의 분석원리 대로 전부 저나름으로 분석하여 공부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송재학 시인의 은유는 결국 A=B 식이지만 그것을 좀 더 기교 있게 서술한 것이지요. 그게 결국 그 시인의 역량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분의 시를 원용해서 흉내를 내 보고는 했지만 어쩐지 제 몸에는 잘 맞지를 않는 것 같았습니다. 시 한편을 지으면서 낯설게 하려고 머리를 쥐어짰었습니다. 실제로 쥐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시를 한편 쓴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것이 창작의 고뇌라고 말하면 멋있게 보이겠지만 그러다 보니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은 것은 아닌가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낯설게 하기’가 알파와 오메가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런 류의 시에 가장 대척점에 있는 시인이 독문학자라고 하는 김광규 시인이라고 평소에 생각했습니다. 그 분 시를 보면 그저 평범한 산문을 행갈이 해놓고 어떤 포인트만 살짝 시적인 감성을 덧붙였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상만 많이 받대요. 사실 명성이 그래서 그렇지 별 것 아닌 시도 많습니다.
이제 저 같은 나이에 새삼스럽게 실험적 기법을 공부하기도 그렇고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우왕좌왕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습니다. 잘 나든 못 나든 이제는 ‘내 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형식에 묶이지 않고 싶지만 그래도 이 ‘낯설게 하기’는 그렇게 가볍게 버릴 것은 아닙니다. 제 나름대로 제 식으로 변형시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시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 있다면 일부러라도 반드시 도전해야 하는 관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