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조대호

“행복(daimonia)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by 현목

네이버 열린 연단 강연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었습니다. 이우창 교수, 손병석 교수, 조대호 교수의 강연을 듣던 중 조대호 교수의 강연이 저에게는 그나마 머리에 정리되어 들어왔습니다. 집에 몇 년째 사두고 읽지 않던 『니코마코스 윤리학』(천병희 옮김)을 읽는 도중에 미리 강연을 듣지 않았으면 그마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는 얘기는 구체적인 것들을 복잡하게 나열하기에 미리 예비 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라고 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잇는 철학자라고 알고 있었고,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子)’를 말했다는 정도의 지식만 있었습니다. 심지어 『니코마스코스 윤리학』이라고 하는데 왜 ‘니코마코스’라는 말이 붙은 이유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보니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다음에 아들이 이 책을 편집을 했는데 아들 이름이 ‘니코마코스’였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그저 도덕적인 교훈이나 말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습니다만 그것이 ‘행복’에 대한 이야기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정리하고 싶어서 이해하기 쉽게 강연을 했던 조대호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의 예상―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개론서가 아닐까 하는―과는 달랐습니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전기(傳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노정(路程)을 조대호 교수가 직접 그리스로 가서 여행하면서 감상을 적은 것입니다. 제6장에 가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합니다. 네이버 열린 연단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중복되는 것도 있고 같은 내용이지만 달리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여정(旅程)을 조대호 교수님의 말씀대로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북부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도 의사 가문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아리스토텔레스 하면 그저 그리스 사람인 줄 알았으나 그는 마케도니아 출신이라는 것이 평생 족쇄가 되어 아테네 사람들에게 홀대를 받았습니다. 아테네 시민권이 없었고 거류민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다릅니다. 그 차이점을 잘 드러내는 것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플라톤은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팔을 들어 땅을 손바닥으로 가리킵니다. 두 사람의 손의 방향이 자신들의 철학적 지향점을 나타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했습니다. 심지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매미 소리’라고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열일곱 살에 아테네로 유학 와서 20년 동안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습니다. 플라톤이 죽자 그곳을 떠나 현재 터키의 베람칼레라고 하는 아소스로 갑니다. 그리고 그리스 땅이지만 터키에 가까운 레스보스 섬에서 머물며 생물학을 연구합니다. 레스보스는 서양 생물학의 탄생지라고 합니다. 거기서 그는 철학이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2년 동안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플라톤이 중시했던 수학과 기하학을 가르치지 않고 호메로스를 가르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37세의 나이로 ’아카데미아’를 떠난지 13년만에 아테네로 돌아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처럼 ’뤼케이온’을 열어 12년 동안 머뭅니다. 거기서는 그간 수집하고 연구한 내용을 연구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에 대한 생각은 플라톤과 아주 달랐습니다. 플라톤은 감각이 아닌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만이 참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의 천체나 땅과 바다의 동식물 등 자연이야말로 실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 열병으로 죽습니다. 그러자 아테네에서는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시작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외가에서 물려받은 집이 있는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로 도피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장병으로 기원전 322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학문의 토대를 놓은 서양 학문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는 형이상학의 철학보다는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고 자연의 경이를 관찰하는 데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제6장의 ‘행복한 삶의 길을 찾다’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우선 ‘행복‘이란 사전적으로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지 보겠습니다. 사전적 정의가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정의와 일치하는 것인지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사전적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말하자면 행복에는 기쁨, 즐거움, 쾌락이 있어야 하고 자족감으로 귀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정의는 다릅니다. “행복(diamonia)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여기서 유의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레테(arete)‘는 본래 도덕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처음에는 ’덕(virtue)’이라고 번역했으나 요즘은 ‘excellence’ 즉 탁월성으로 번역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플라톤은 영혼을 육체와는 별개의 정신적인 무엇으로 보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신체와 그 기능 전체를 영혼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신체가 죽으면 영혼도 없어집니다. 어찌 보면 유물론의 아버지인 것도 같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행복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지적한 점입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은 원효 대사 말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잘 대변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장자도 심재(心齋)니 좌망(坐忘)이니 하면서 마음을 비워서 불행이 닥쳐도 마음가짐을 평안히 가지면 해결된다는 식이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어느 쪽이 더 진리에 가까운지 조금은 머리가 멍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다시 말해 행복의 핵심 키워드를 저는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가 ’습성의 탁월성‘ 둘째가 ’실천적 지혜‘ 그리고 셋째가 ’사유의 탁월성‘입니다.


제일 먼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에는 섭생기능, 감각기능, 운동기능, 욕망기능, 사유기능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것은 사유기능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성의 기능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좋은 것을 욕망하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동을 합니다. 인간에게 행동을 일으키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가장 알기 쉬운 것이 생존을 위해 먹는 것과 종의 번식을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경험이나 학습을 통해서 얻은 습관이 행동을 일으킵니다. 세 번째가 추론이나 상상(이성)을 통해서 더 나은 행동을 찾습니다. 그때 본성과 습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자유가 동물과 다른 인간이 고유한 기능을 실현시킵니다.


우리는 ’행복‘하면 대다수가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맛있는 것을 먹고는 “맛있다! 행복하다!“라고 합니다. 혹은 목욕탕에 따뜻한 물에 온몸을 담그는 노곤하게 늘어지지는 신체의 쾌감을 느끼면서 ”나는 행복하구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행복에는 즐거움, 쾌락이 따랍니다. 즐거움은 다양합니다. 먹는 것, 성적인 것, 돈 버는 것, 명예를 얻는 것, 문화적인 것, 정신적인 것…….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즐거움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을 낳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저에게 즐거움을 낳는 것은 글쓰기와 책읽기입니다. 갑자기 이백이 생각납니다. 이백은 평생 시 쓰고, 책 읽고 술 마시다가 갔습니다. 어쩌면 그게 이백의 행복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나요? 즐거움에는 위계가 있나요? 즐거움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나요? 즐거움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eudiamonia)은 ’즐거움’ 자체가 아니라 ‘잘 사는 삶’ ‘잘하는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 주관적 감정 상태보다 객관적 상태인 활동을 가리킵니다. 동물이 잘 사는 것은 생명을 잘 유지하고 번식을 잘 하고 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티비에서 보는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의 주인공들은 어쨌든 스스로 행복하다고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은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행복해 보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두 가지를 끊었습니다. 하나는 비교입니다. 세속에서 부딪치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인위적으로 숲속으로 들어옴으로써 비교를 단절시켰습니다. 다른 하나는 욕망을 본성에 국한시키고 습관이나 이성이 일으키는 욕망은 제외시켰습니다. 말하자면 욕망을 최소한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즉 먹고 마시고 번식하는 것은 이 윤리학의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윤리적 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에도 수준 차이가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인간은 동물적 욕망만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지성(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이라고 하면 당연히 고상한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만 조대호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성은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을 파괴하는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성은 동물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동물적 욕망 그 너머를 창조하기도 합니다. 지성은 욕망과 맞물려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욕망에는 세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본성적 욕망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생존을 위한 본능적 성질입니다. 둘째는 습관에 의거한 욕망이 있습니다. 습관이 들어서 찾게되는 욕망을 말합니다. 셋째는 이성적 욕망입니다. 예컨대 영원을 갈망한다든지 합니다. 욕망 자체는 이성적이 아닙니다. 이런 욕망을 습관이라는 반복을 통해 욕망이 본성으로 가지 않고 행복으로 갈 수 있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성의 기능을 ‘실천적 지혜‘라고 하고 습관이 중용으로 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이런 결과를 ’습성의 탁월성‘이라 부릅니다. 이것을 ’윤리적 탁월성‘ ’성격의 탁월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즐거움을 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동‘ 혹은 ’활동‘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인간은 무엇인가를 욕망하여 행동을 일으킵니다. 이때 욕망을 잘 조절하여 행동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도록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작동시키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아레테(arete)’입니다. ‘아레테’는 어떤 기능을 잘 실현시킬 수 있는 탁월성을 말합니다. 사람으로 잘 산다면 그것은 그만의 ‘아레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 ‘아레테’는 전문적 기능을, 예컨대 달리기 선수, 피아노 연주자와 같은 탁월성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탁월성이 필요한 곳을 인간의 습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습성이란 반복된 행동으로 인하여 생겨난 고정된 행동방식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성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눕니다. 감정, 외적 좋음, 그리고 사회적 삶입니다. 욕망에 의한 개별적 상황마다의 행동에서 중용을 취하는 것을 탁월성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감정에서 즐거움과 고통에 관련해서는 절제가 탁월성이고, 외적 좋음인 재물의 경우는 낭비와 인색의 중용인 ‘자유인다움‘이 탁월성이고 사회적 삶과 관련해서는 이익과 손해 사이의 정의를 탁월성이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복된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은 개인의 행동 성향으로 내면화된다고 했습니다. 습성의 탁월성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습성의 탁월성‘을 이끄는 것이 ’실천적 지혜‘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 덕을 지향합니다. 습성의 탁월성으로 이끄는 실천적 지혜는 이성에 속하며 개별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실천적 지혜는 숙고하여 중용을 선택하고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실천적 지혜가 작동하여 숙고까지는 이르기는 하지만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보고 하는 소리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두 개의 욕망이 싸웁니다. 즐거움에 대한 욕망과 탁월성에 대한 욕망이 그것입니다. 의지가 부족한 사람은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 항상 승리하는 것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사는 삶’ 즉 행복의 조건으로 습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 두 가지를 듭니다. 사람은 행동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무언가 알고 싶어하고, 무언가 새롭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런 욕망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사유의 탁월성’입니다. 이것은 습관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서 이룰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기능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이론적 기능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학문의 앎, 지성적 직관,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의 특징은 우리와는 떨어져 있는 객관적 대상을 다룹니다. 둘째, 실천적 기능은 실천적 지혜라고도 하며 주로 행동에 관여합니다. 적절한 행동을 위해서는 실천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셋째, 제작적 기능은 기술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의술이나 건축 기술이나 예술 작품이 여기에 속합니다.


세 종류의 윤리학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으로, 행복은 탁월성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선의지의 명령을 의무로 받아들여 이행하는 것이 선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칸트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칸트의 최고선은 도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이라면 행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최고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혼이 불멸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이 요청된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효용, 이익을 증대시키는 활동이 좋은 활동이라는 공리주의적 입장이 있습니다. 영국의 제러미 벤덤이 대표적 철학자입니다.


그럼 실천적 지혜(습성의 탁월성)와 철학적 지혜(사유의 탁월성),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일까요? 사람마다 의견이 엇갈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생각이 왔다리갔다리 했지만 굳이 말하자면 철학적 지혜에 더 방점을 찍는다고 했으나 조대호 교수는 실천적 지혜 쪽을 선호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잘 사는 데는 습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이 필요합니다. 탁월한 행동과 사유에서 오는 만족감과 즐거움이 바로 자기실현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행복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런 논의는 『정치학』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사적 행복이 있고 공적 행복이 있습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전쟁에 휩싸인다든지 기아나 재해로 피폐해지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국가는 구성원인 각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생존권을 보호해 주고 또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교육으로 잘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특이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겸손, 희생, 효도, 충성, 자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또한 저는 행복에는 적극적 행복과 소극적 행복이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봅니다. 행복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항상 만끽하면서 살아가야 행복한 삶인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불행하지 않으면 그게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소극적인 행복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 좋음에서 재산과 명예의 경우 그것들을 티끌로 여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재산과 명예가 행복에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생각 같습니다. 돈이 없고 명예가 없는 사람보다는 그런 조건에 있는 사람이 행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는 많은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행복관은 어떤 것일까요? 오복을, 즉 행복을 『서경(書經)』에서는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이라 했고 청나라의 적현(翟顯)이 쓴 『통속편(通俗編)』에서는 오복을 수(壽)·부(富)·귀(貴)·강녕(康寧)·자손중다(子孫衆多)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유호덕’ 즉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습성의 탁월성’을 같이 언급했다는 점입니다.


저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동의는 하지만 어쩐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살다가 정말로 사고라든지, 치명적 병이라든지, 가족의 상실이라는 불행을 당했을 때 과연 ‘습성의 탁월성’이나 ‘사유의 탁월성’으로 극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수간호사 L선생의 경우, 담낭암으로 사망한 동생의 불행을 마음가짐만으로 극복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습성의 탁월함’ ‘사유의 탁월함’이라는 행동 혹은 활동인 환자의 간호에서 자신은 견디고 넘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세상 살면서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불가항력적으로 엄습해 오는 불행을 어떻게 대처하느냐도 행복에 연결된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습성의 탁월성’ ‘사유의 탁월성’으로 극복할 수도 있고 불교식으로 ‘무아(無我)’를 통한 깨달음으로 거기에 갈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의 마음이 있습니다. 옛날에 읽었던 찰스 스윈돌의 ‘작자 미상의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주님, 기꺼이 그리하겠나이다/주께서 주시는 것은 받고/주께서 거두시는 것은 없이 살고/주께서 취하시는 것은 놓고/주께서 주시는 고통은 견디겠으며/주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겠습니다’


이제 남은 여생에서 추구해야 할 행복의 길은 어떤 것일까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에 대해 말한 것을 저 나름으로 표현하자면 ‘습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는 자기실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길은 다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행복은 자신이 숙고하고 자신이 선택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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